2020년 3월 4일 수요일

by 모조

네 번째 날, 혼자 살기에서 함께 살기로.


제주집에 처음으로 친구가 놀러 오는 날이다. 친구의 비행기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이려다 보니, 오히려 늦장을 부릴 수 있었다.


고든 램지 형님과 제이미 올리버 형님(잘 지내시나요...ㅠㅠ)에게 배운 스크램블드 에그를 해봤다. 보통 우리가 라면 끓일 때 쓰는 편수냄비를 이용하면 좋다. 주물냄비가 나중에 설거지하기도 좋고 열전달도 잘돼서 더 쉽고 맛있게 조리되는 것 같다. 1인분 기준으로 계란 세 개와 적당한 양의 버터를 주물 냄비에 넣고, 약한 불에서 계속 저어주면 된다. 버터가 다 녹고 계란이 익어가기 시작할 때 익은 부분을 스파출러로 긁어가며 계속 저어주면 금방 스크램블드 에그가 완성된다. 중간중간 불에서 냄비를 멀리한 상태에서 저어주면 눌어붙지 않고 더 잘된다. 마지막에는 냄비 한쪽으로 잘 몰아서 모양을 만들어 내면 호텔 조식 스크램블드 에그가 부럽지 않다.

스크램블드 에그와 함께 감자 식빵으로 버터 토스트를 해 먹었다. 오늘은 버터를 조금 더 스프레드 하고, 위에 바질을 살짝 뿌렸는데, 확실히 스프레드를 하니 버터향이 더 골고루 퍼져서 더 좋은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토스터가 다 한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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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정리를 대충하고 버스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며칠 안 지났는데, 마당의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조금씩 새순이 돋아나고, 꽃망울이 피는 게 보인다. 이 집에 머무는 동안 만개하면 참 좋을 텐데, 청춘의 기운을 한아름 머금고 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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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 나가는 길에 책이나 좀 읽으려 했는데,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평소보다 침대에 머문 시간이 더 길었음에도 푹 잤다. 알게 모르게 피곤했나 보다.


시간이 좀 남아서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게이트 앞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많은 인파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요즘 외국으로 나가기 힘들고 가격도 저렴하니 제주에 더 많이 오시는 거겠지.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오니 조금 당황스럽다.


먼저 인사하겠답시고 일찍부터 와서 열심히 출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아주 잠깐 조카님 영상 보느라 멍 때리는 와중에 먼저 인사를 받았다. 요즘은 악수나 포옹보다는 손소독제를 나누는 게 더 반가운 인사라는 생각에 준비한 소독제로 인사했다. 이번에 놀러 온 지인은 대학교 동기로 어느새 10년이 넘게 인연을 이어온 친구와 그의 여자 친구분이다. 아마 혼자 살다 굶어 죽을까 봐 일부러 제주까지 놀러 와 준 것 같다. 앞으로 2주 동안 함께 지내게 될 소중한 하우스메이트님들 이시다.


공항에서 빠져나와 친구네 렌터카에 신세를 졌다. 집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서 장을 보고, 궁금했던 빵집에 가서 빵도 샀다. 달팽이라는 뜻인 르 에스까르고라는 빵집인데, 초코 식빵이 유명하다. 근데 워낙 단걸 안 좋아하는 터라 진짜 단 1도 끌리질 않아서 바게트랑 치아바타를 샀다. 나중에 점심으로 먹었는데,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클래식 크로와상을 사서 아침에 데워서 먹어보고 싶다.


친구 덕에 편하게 집으로 왔다. 게스트룸으로 안내하고, 간단히 짐을 풀었다.(장본 것도 있어서 한 번에 옮길 수 있을지 몰랐는데 손이 많으니 한 번에 된다.) 빵집에서 사 온 빵을 데워 점심을 먹고, 집 뒷마당에 있는 감귤?나무에서 거대한 귤을 따서 나눠 먹었다. 난 저거 먹어도 되는 건지 몰랐는데, 먹을 수 있는 거였네. 혼자 있었으면 한 달 내내 관상용 귤로 남아 있었을 거다.


친구가 10km 러닝을 뛰러 가는 시간에 맞춰 친구의 여자 친구분과 함께 오름을 올랐다. 날이 맑은 오후에 올라 그런지 녹음도 더 푸르고 하늘도 더 파란 것 같았다. 거기에 천천히 걸으며 주고받는 대화가 있어 시간도 후다닥 지나갔다. 오늘도 오름에 오르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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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리 시골길따라 오름 가는 길, 그리고 오름 방문 인증샷 스팟에서 인증샷 남기기까지 성공!


낮달이 예쁘게 피었다. 제주에 온 뒤로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니 이런 게 다 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하늘이 맑아지는 걸 보니 밤하늘이 참 아름다운 밤이 될 것 같다.



딱히 뭐 한 거 없이 그냥 시간이 지나더니 어느새 저녁시간이 됐다. 저녁을 먹기 위해, 테이블 매트를 세 개 깔다 보니 혼자 쓸 때는 너무 넓어서 문제였던 테이블이 좁아져 레이아웃도 바꿨다.


저녁 메뉴는 이마트에서 장을 볼 때 정했던 훈제오리 단호박찜. 여자 친구분께서 헤드셰프를 맡으셨는데, 집에 마땅한 찜기가 없어서 전자레인지로 만들어 내느라 고생하셨다. 훈제오리를 한 번 구워서 기름기도 빼내고, 단호박도 다 긁어내고, 치즈도 얹고, 전자레인지에서 몇 번을 넣었다 꺼내고 나니 훈제오리 단호박찜이 완성됐다. 일단 비주얼부터 훌륭했고, (단호박이 조금 덜 익은 곳들도 있었지만) 훈제오리들도 기름기가 적당히 빠져 맛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차려준 밥을 한 상에서 같이 먹은 것 같다. 어머니의 손맛이 아닌 다른 이의 음식을 이렇게 먹어본 게 얼마만인지.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게 별거 아니지만, 생각보다 참 많은 의미를 갖는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식탁의 레이아웃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원래 이랬던 것처럼 편안해진 것도 함께 밥을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 온 이후로 계속 그랬지만, 다시 한번 올해 여가 콘셉트는 ‘파인 스테이의 삶’으로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제주에 와서 이런 메뉴를 차려먹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혼자서 한 달을 보냈다면 평생 못 먹어봤을 메뉴다.


이미 충분히 풍만한 하루였지만, 화룡정점이 남아있었다. 친구들이 갖고 온 보드게임, 스플랜더. 설명을 읽다 보니 예전 승진자 교육 때 했던 커리어 빌드업 게임과 룰이 매우 유사했다. 덕분에 한 번에 바로 이해하긴 했는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중요한 순간에 내 패에만 집중하다 망치는 건 똑같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더더욱 중요한 순간에 나를 잡아줄 수 있는 지인들이 소중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인복이 있기에 지금까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걸 테고. 한 판도 못 이겼지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스플랜더>, 하나하나 배우는 재미가 있다. 한 번 쯤음 이겨야 할텐데... 한 번 정도는 이기는 날이 오겠지?


집의 모든 불이 다 꺼진 후, 사람의 온기가 더해진 집에서 잠들 생각을 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은 더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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