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5일 목요일

by 모조

다섯 번째 날, 제주에 온 지 5일만에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 그래, 난 제주도에 있었다.


여전히 새벽 6시에 잠이 한 번 깬다. 푹 자고 일어난 거 같은데, 침대에 조금 더 있고 싶어 다시 한 번 눈을 감는 걸 계속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잠결에 꿈을 꿨다.

백종원님과 다른 누군가(차승원님 같았는데 확실하지 않다. 아마 삼시세끼의 잔상이 반영된거 아닐까 싶다.)와 함께 요리하는 꿈을 꿨다. 이때는 이게 무슨 의미일지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계란장과 된장찌개가 맛있게 될 거라는 걸 얘기해주는 꿈이었나 보다.


아침을 먹으러 나왔는데, 앞마당 구석에서 꿩 한 마리가 수풀 사이를 거닐고 있다. 매일 오름을 오가며 야생동물 한 번 만날 기회가 있으려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집에서 만나니 느낌이 새롭다. 잠깐 눈을 돌린 사이 사라져 버렸던 터라 더 신기루 같았다. 오전에 친구가 마당에서 그 꿩인지 다른 꿩인지 모를 꿩을 발견한 덕분에 내가 본 게 신기루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문득 궁금했다. 농장이나 동물원이 아닌 곳에서 내가 꿩을 본 적이 있었던가?


어제 슬라이스 하고 남은 라임이 냉장고에 있길래 토스트 메뉴를 급조해서 만들어봤다. 버터 바르고, (어제 훈제오리 단호박찜 하고 남은) 치즈 얹고, 라임 슬라이스 얹어서 토스터에 넣었다. 생각했던 향이나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은 시도였다. 비주얼은 괜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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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아침식사, 한 번 해먹고 다시는 안 해먹은건 안비밀.


처음으로 시간을 재며 오름을 올라봤다. 집에서 오름 산책로 입구까지 10분, 산책로 입구에서 오름 둘레길까지 5분, 둘레길 한 바퀴에 10분. 둘레길을 세 바퀴 도니 딱 왕복 한 시간 코스다. 요며칠 날씨가 좋다보니 오름을 오르기 한결 좋다. 바람이 조금만 잦아 들면 더 좋아질 것 같다. 아직 야생동물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아직 날이 많이 남았으니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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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오름은 오늘도 맑음.


오름을 들렀다 오는 길에 오고 가며 봤던 봉성리 작은도서관을 들렀다. 문 앞에 뭔가 공지문 같은 게 붙어 있어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입구까지 갔더니 역시나 코로나19 탓에 당분간 운영을 중지한다고 한다. 여기서 책 한 권 씩 빌려다 읽는 것도 할 일에 있었는데, 이것도 이제 못하겠네... 집에 있는 책이나 읽어야 겠다


햇살이 따듯하게 내리쬐던 오전, 폴딩 도어를 활짝 열고 햇빛과 바람을 만끽하고 있던 중에 핸드폰 알람소리와도 같은 새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있던 세 명이 모두 ‘이거 진짜 새소리야?’하며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소리였다. 이런 새소리를 들은게 언제였던지, 아주 짧지만 강렬한 순간이었다.


애월 하나로마트는 마트 같았다. 정육코너 있고, 선어물코너도 있고, 피자도 판다. 버스타고 올 수 있으니 다음부턴 여기로 장보러 와야겠다.


근 일년만에 제레미를 재방문했다. 여전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커피는 산미가 매우 강해진 것 같지만, 얼죽아에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온 김에 집에서 내려먹을 원두도 샀다. 기왕이면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책을 읽거나 친구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들러야 겠다.

제주 애월에서 가장 애정하는 카페, Jeremy.


봉성리에만 있을 때는 집이 너무 좋아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한라산 View에 제주 돌담집에 둘러 쌓여 있으니 항상 제주에 있다는 것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굳이 바다를 봐야하나 싶었는데, 막상 또 바다를 보니 느낌이 다르다. "아, 내가 제주도에 있었지." 싶다. 5년 전 신입사원 연수 때도 바다를 보고 나서야 '아, 그래. 내가 제주에 있었지.'했던 것 같은데, 아직은 바다가 더 좋은가 보다. 바람이 잦아들면, 다시 한 번 바다를 찾아야겠다. 거기서 그냥 멍 때리다 집에 와서 낮잠 자면 참 좋겠다.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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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들렀던 애월 바닷가, 바람이 무척이나 세개 불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바다라 한참을 머물렀다.


집 처마에 조그마한 거미가 거미줄을 내리고 살며시 내려와 있었다. 점심 때쯤 방문한 이 꼬마손님은 해가 질 무렵 거미줄을 기어 오르며 사라졌다. 이렇게 가까이서 거미를 본 게 얼마만인지. 혹시 저 개미에 물리면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소리를 꽤나 진지하게 주고 받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걸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바닷바람까지 쐬고 났더니 배가 고파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어제 르 에스까르고에서 사온 바게트와 우유로 가볍게 먹었다. 아침도 빵, 점심도 빵. 뭔가 익숙한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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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밑반찬으로 요즘 게장과 경쟁 중인 밥도둑 반숙 계란장을 만들었다. 근데... 일단 계란이 반숙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계란장이 될 것 같다. 삶은 계란 12개, 양조간장 1L, 물 1L, 올리고당 700ml, 청양고추, 양파, 홍고추, 대파를 한 번에 때려 넣었다. 친구가 갖다 준 락앤락 통 중에 제일 큰 통에 넣긴 했는데, 어째 불안불안하더니 냉장고에 넣는 중에 범람하고 말았다. 레시피고 뭐고 급하게 국자로 간장을 마구 퍼냈다. 물이랑 간장이랑 올리고당이 1:1:1이 되어버린 거 같은데... 별 탈 없이 잘 되겠지? 내일 먹어봐야지. 반숙이 아니어도 맛있을거야.


제주도에 와서 처음으로 ‘국’을 끓였다. 사실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찌개와 국의 중간 어디가 됐는데, 진짜 맛있었다. 역시 재료를 아끼지 않고 넣으면 평균은 가는 법이다. 제주에 온 이래 처음으로 밥을 리필해서 먹었다. 다행히 친구들의 입맛에도 맞았는지, 엄청 맛있게 먹어줬다. 한 솥 끓였는데, 한 솥이 텅 비었다. 아침에 백종원 선생님 꿈을 꾼 게 다 이유가 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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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와서 첫 국물요리, 재료를 마구 집어 넣었더니 맛있게 완성됐다.


친구들이 우무(umu)에서 푸딩을 사왔다. 러너들이 대단하다고 느낀게, 차가 없으면 갈 생각조차 못할 거리를 그냥 운동 삼아 다녀오신다. 진짜 리스펙. 우무는 한림에서 꽤나 유명한 디저트 가게 중 하난데, 제주 해녀가 채취한 우뭇가사리를 이용해 만든 푸딩을 파는 곳이다. 언제나 줄이 길게 서있는데다가, 판매수량도 정해져 있어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가야하는 곳 중 하나다. 그래서 당연히 포기하고 있었는데, 친구들 덕에 호사를 누렸다.

일단 패키지는 합격. 커스터드, 말차, 초코 하나 씩 사서 조금 씩 맛을 봤는데, 식감이 참 독특하다. 술술 넘어간다. 역시나 초코는 한 개 다 먹기 힘들거 같고, 커스터드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째튼 맛 봤으니 됐다. 이정도면 충분하다.


애월의 명소 중 하나인 umu의 푸딩. 조금 더 탱글탱글해도 좋을 것 같은데, 우무만의 질감이 매력인거니까.


내일은 일출을 보러 갈 예정이다. 하늘이 맑게 게이면 좋겠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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