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날, 무척이나 부지런하게 돌아다녔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4시, 모두가 일어나 집을 나섰다. 이른 시간에 나오니 어디에도 불빛 하나 없어 별들이 쏟아져내리는 것만 같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별이 보인다는 건, 해도 볼 수 있다는 얘기겠지.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더비 카운티의 잉글랜드 FA컵 경기. 내 사랑 웨인 루니가 뛰는 모습을 오랜만에 볼 수 있는 날이다. 실례인걸 알면서도 어두운 밤길을 운전하는 친구 옆에서 라이브로 경기를 지켜봤다. 물론 전성기 때와 비교하면 플레이 스타일도 바뀌고, 영향력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 맨유에서 뛰는 어지간한 애들보다는 잘한다. 클라스는 영원하다. 경기는 맨유의 완승으로 끝났다. 루니가 한 골 넣고 맨유가 이기길 바랐는데, 둘 중 하나라도 원하는 대로 됐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오늘 경기가 OT였으면 어땠을까, 많은 팬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응원했을 텐데, 박수도 지금보다 더 많이 받았을 건데. 다들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었을 텐데, 너무 아쉽다. 근데 어차피 영국으로 돌아오신 김에, 진짜 그냥 맨유로 오면 안 되나요, Wazza? 애들 빠따 좀 쳐줘요, 제발.
시골길이다 보니 말 그대로 어둠을 헤치고 차에 오르고 한 시간 반을 쉬지 않고 달려 대수산봉에 도착했다.
친구의 여자친구분이 제주 한 달 살이를 했던 숙소가 이 근처라 소개해주신 일출 명소다. 일출과 일출봉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 서서히 동이 트면서 어둠은 가시고 아름다운 색의 하늘이 펼쳐졌다. 어둠과 추위를 뚫고 20여분 오르니 하얀색 벤치 하나가 놓여 있는 포토스팟에 도착했다. 해가 오르기 전부터 얼마나 아름답던지, 오랜만에 꺼낸 카메라로 사진 여러 장 건졌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붉은 해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얼마 만에 만난 일출다운 일출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이게 다 함께 온 친구가 일출 요정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운 일출이었다.
오름에서 언제 야생동물 보나 했는데, 대수산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났다. 눈 앞에서 뭐가 막 움직였었는데, 시야에서 놓친걸 친구들이 찾아줬다. 이게 뭐라고 이리 반갑고 신기한지. 일출만으로도 행복했던 아침을 더 풍성하게 해 준 고나리님, 감사합니다.
붉은 해의 기운을 가득 담은 채로 붉은 갈치&고등어조림을 먹으러 갔다. 성산에 그렇게 자주 갔고, 심지어 최근에는 제주도에 올 때마다 플레이스 캠프에 묵었으면서도 맛나식당을 갈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질 않았다. 워낙에 사람들이 많이 오니 혼자 가는 게 미안해서였는지, 생선조림을 선호하질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리스트에 없었다. 그러니 친구들과 함께 왔을 때 오길 잘했다. 괜히 맛집이 아니다. 양념이 무척이나 맛있다. 밥 한 공기가 진짜 금방 사라졌다. 제주에 와서 5일 만에 처음으로 아침식사로 밥을 먹었다. 아니지, 제주를 떠나, 아침에 밥을 먹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곳을 소개받았다. 오조포구. 이미 제주 여행 좀 다녀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산책로로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뭔가 아지트 같은 곳을 소개받은 것 같아 좋다. 일출봉 가는 길에 있는, 뷰가 매우 좋은 카페도 한 군데 소개받았다. 한 달 동안 성산에 머무는 동안에 자주 찾아왔던 단골 카페라고 한다. 카페 주인과 인사를 주고받는 것만 봐도 진짜 단골이었던 게 느껴진다. 높은 곳에 있어 멋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공간도 참 좋구나 싶다. 성산에서 한 달 살이를 하며 자전거를 타고 구석구석 다닌 친구 덕에 좋은 곳들을 많이 알아 간다. 한 달이 지나고 나면, 나도 봉성리의 숨은 명소들은 전할 수 있겠지. 어도오름도, 여행 온 사람들은 들르기 쉽지 않은 곳이니까. 이렇게 하나 둘 소개할 수 있는 장소들을 알아가야겠다. 오늘 느낀 이 묘하게 좋은 감정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마음에 드는 사진과 영상도 구했다. 차분하고 충분하게 좋은 기운을 채우는 아침이 계속되고 있다.
드디어 적당한 사이즈의 꿀을 구했다. 총 세 곳의 하나로 마트를 방문해서야 찾아냈다. 이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이제 허니 버터 토스트를 만들 수 있다. 어렵사리 구한 귀한 꿀이니 빨리 먹어버려야겠다.
성산에서 제일 좋아라 하는 스타벅스, 성산DT점. 여기 2층에서 멍 때리는 건 언제나 행복하다.
성산에 머무는 내내, 한 마리의 댕댕이를 자주 마주쳤다. 꼬리가 빗자루처럼 멋지게 정돈된 데다가, 눈매도 살아있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잘 따르는 걸 보면 분명 주인이 있는 댕댕이였다. 주인이 있는 댕댕이여야 했다. 맛나식당 앞 주차장, 스타벅스 앞, 성산 일출봉 가는 길, 일출로에서 광치기해변으로 가는 길까지 함께 했다. 심지어 광치기 해변으로 갈 때는 길잡이 역할도 해줬다. 중간중간 돌아보며 여기까지는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녀석이 어찌나 늠름해 보이던지. 해변을 거닐 때는 발걸음도 맞춰주더니 모래사장을 빠르게 뛰어가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 어느새 정이 들었던지 사라지니 마음이 시원섭섭했다.
근데 이 댕댕이는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까, 똑똑하니까 주인이 믿고 놀러 갔다 오라고 하는 거면 좋겠다. 편의점에서 간식이라도 하나 사줄 걸 그랬다. 한 번이라도 더 쓰다듬여 줄걸 그랬다. 유기견은 아닐 거다. 진심으로 아니길 바란다. 아니겠지? 아직도 궁금하다.
광치기 해변은 올 때마다 아름답고 신기하다. 지난번에는 사진 하나 제대로 남길 생각에 제대로 눈에 담지 못했던 것 같아, 카메라는 아주 잠깐 들었다. 뭐... 그 와중에도 엄청나게 많이 찍긴 했지만.
지난 여행에서 종달리가 정말 훅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소심한 책방, 모뉴에트, 종달리 746, 프렌치터틀(여기는 이제 문 닫았지만...)까지 하나하나 매우 매력적인 공간들이었다. 친구가 두 번이나 실패했다는 갈비국수를 먹으러 가기 위해, 그 종달리를 다시 찾았다. 산도롱 멘도롱으로 가는 길이 마침 이스트엔드와 프렌치터틀이 있던 길이었는데, 지나며 보니 어느새 다른 가게들이 자리 잡았다. 그곳들도 다른 매력을 가진 가게들 일거라 믿고 싶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이곳에 왔을 때, 종달리가 계속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아, 갈비국수도 맛있었다. 제주 여행 올 때마다 고기국수 먹는 게 지겨운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문 마감돼서 못 갈 수도 있으니 식사 시간을 조금 피해서 가라고 해야겠다.
엄청 알차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제주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봉성리와 성산을 왕복했는데도 해가 지지 않았다. 오름을 다녀오기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매일 오름 오르기 미션은 순항하며 현재 진행형!
계란장이 맛있게 잘 된 것 같다. 예상한 대로 반숙은 아니지만 그래도 밥과 함께 하는 반찬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이래서 다들 장조림 안 하고 계란장 해 먹는구나?
내일은 비가 온단다. 비가 지나고 나면, 앞마당의 매화, 살구꽃이 필 것 같다. 비가 얌전하게 오려는지 바람마저 차분하다. 이렇게 바람이 불지 않는 밤은 처음이다. 차분히 가라앉는 분위기처럼 차분히 잠들면 좋겠다.
토요일이 다가오고 있다. 로또의 신이시여, 1등이면 좋지만 3등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