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9일 월요일

by 모조

아홉 번째 날, 친구님들 덕분에 너무나도 감사한 호사를 누린 날이다.


피곤했나 보다. 꽤 오랜 시간 푹 잠들었다. 맨더비가 있는 날인데 그것도 안 보고 계속 잠을 잘 정도로 잠만 잤다. 아침에 이렇게 개운하게 일어난 것도 참 오랜만이다. 역시 사람은 잠을 자야 한다.


생에 처음으로 노른자 염지를 해 먹었다. 젓갈류가 왜 비싼지 알겠다. 이렇게 소금을 많이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의도치 않게 30시간 정도 더 숙성된 노른자는 매우 신기한 맛을 냈다. 일단 무진장 짠데, 따듯한 토스트 위에 얹으니 녹아들면서 치즈 같은 풍미를 냈다. 인터넷에서 보니 더 오래 숙성시켜서 파마산 치즈처럼 갈아 쓴다고 하던데 한 번 먹어봤으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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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노른자만 발라내는 것도 어려웠다... 아직 스킬이 부족해ㅠㅠ 하루 이상 염지하면 그냥 치즈처럼 갈아 드세요.


오랜만에 아침에 오름을 갔다. 아침 공기는 확실히 다르다. 산책 중 우연히 민달팽이를 만났다. 매우 천천히 움직이는 녀석이었다. 맞다, 달팽이는 원래 천천히 움직이는 거였지. 객인 내가 민달팽이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될 것 같아. 달팽이를 발견한 구간에선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어느 때보다 더욱 발아래를 바라보며 걸었다. 그렇게 민달팽이를 네 번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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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어도오름 가기 미션 여전히, 완벽하게, 착실히 진행 중!
민달팽이는 살아 있습니다. 기어가고 있는 거 보이시죠?

친구 덕분에 포도호텔을 가는 날이다. 들뜬 마음에 오름에도 일찍 다녀왔고, 짐도 일찍 싸고 호텔로 떠날 시간만을 기다렸다. "은인"들과 함께 포도호텔에서 그 유명한 우동들을 먹었다. 솔직히 포도호텔에서 우동을 먹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었다. 지인에게 제주에 머무는 동안 포도호텔은 꼭 한 번 갈 거라고 했더니 '우동 드시러 가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야, 그 유명세를 알았다. 먹어보니 맛도 맛이지만,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제주에서 조용하게, 천천히 여유롭고 느긋하게 지인들과 식사를 즐기기에 이만한 장소가 또 있을까 싶다. 세 명이 같이 간 덕분에 다양한 메뉴도 시켜먹을 수 있었다. 새우튀김우동 정식, 짬뽕 우동, 보말 볶음우동을 시켰다. 보말 볶음우동은, 일단 처음 먹어보는 메뉴였고, 적당히 잘 익은 면에 걸쭉한 소스를 듬뿍 바르고, 아낌없이 들어간 보말을 꺼내 얹은 후 먹다 보니 소스까지 다 긁어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짬뽕 우동도 해산물이 아주 푸짐하게 잘 들어가 있고(해장으로 최고일 거 같다), 새우튀김 우동은 튀김이 진짜 실했다. 저녁에도 (혼자서는 코스요리를 시킬 수 없다 보니) 한우 스키야키 우동을 먹었는데 역시 먹는 건 품질과 가격이 정비례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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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맛있었던 보말 볶음 우동, 베스트셀러 새우튀김우동 정식, 든든한 저녁 한 끼 한우 스키야키 우동.


점심까지 든든하게 얻어먹고 나니 체크인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조금 늦게 점심식사를 했음에도 워낙 호로록 먹다 보니 그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봤더니 방청소가 완료된 방이 있어, 운 좋게 정해진 체크인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포도호텔, 제주도에 있는 호텔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일단 건축적으로 매우 훌륭하다. 재일교포 건축가인 이타미 준 선생님이 디자인한 단층 호텔은 이 곳은 제주의 오름과 산을 모티브로 지어진 건물이다. 포도호텔이 된 건 하늘에서 이 호텔을 바라봤을 때 한 송이의 포도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단층 건물의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호텔 곳곳에 이타미 준 선생님의 철학과 예술정신이 담긴 인테리어를 확인할 수 있다. 평소에는 투숙객을 대상으로(비투숙객의 경우, 15,000원에 참여 가능) 무료로 건축 예술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코로나 19 탓에 아쉽게도 투어에는 참여하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쉬웠지만, 대신 나 혼자 내 템포에 맞춰 느긋하게 둘러보며 마음껏 건축물 그 자체가 예술로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어 좋았다.

호텔 방 안의 의자나 침대에 앉거나 누워보기도 전에, 그저 호텔 건물을 한 바퀴 둘러봤을 뿐인데 벌써부터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드는 문득 자주 생각나는 토픽 중 하나인데, 유명한 건축가가 디자인한 건물을 방문한 후에는 해당 건축가와 건물에 대한 공부를 조금 더 심도 있게, 적극적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백지상태에서 오감과 경험치에 느낄 수 있는 매력도 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남기고 기억하고 싶어 졌다. 그냥 지금처럼 마냥 공간감이 좋다는 느낌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장소들을 발견하고, 기억하고, 추려내는 것도 너무 좋다. 다만 이번처럼 기대 이상의 경험을 했던 곳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게 이해하고 각인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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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호텔은 호텔 서비스나 어메니티를 떠나 건축물 그 자체의 매력만으로도 충분히 경험해볼만한 공간이다.
포도호텔 건축 예술 가이드 소개 영상 : https://www.thepinx.co.kr/podo/web/arch_guide.px


방도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슬라이딩 도어를 열면 펼쳐지는 풍경은 누구나 바로 사랑에 빠지게 할 만큼 매력적이다. 방문했던 날은 비가 꽤 세차게 내리고 있어 운치를 더했지만, 맑은 날에 테라스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시간을 보내는 게 그렇게 좋을 것 같다. 한두 번 도전했는데, 비바람을 맞다 보면 채 10분도 견디기 힘들어 결국 방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대신 무척이나 편한 소파에 앉아 글을 쓰며 창 밖을 바라보는 것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의자가, 그렇게 안 생겼는데, 진짜 엄청 편했다. 일어나기 싫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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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가구들이긴 하나 세월의 흔적이 아름답게 내려앉았다. 새로 오픈한 호텔에 비하면 조금 아쉬워 보일 수 있으나 하나하나 다 편안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거나 누워있게 된다.


빗소리도 좋고, 열린 창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빌리 아일리시 노래도 참 좋았는데, 추워서 오래 있질 못했다.

호텔에서 다른 사람이 해주는 밥과 편안한 침구의 매력에 빠져들다 보니 아무것도 안 하면서 쉬는 게 뭔지 느낀 하루였다. 고작 일주일이었는데 집안일들이 생각보다 많이 신경 쓰이는 일이라는 걸 이제 알겠다. 그냥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멍하니 풍경을 보거나 TV 속 연예인들의 유머에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TV가 괜히 바보상자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이러는 와중에도 루틴은 지킬 수 있게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했는데, 이번엔 좀 힘들 것 같아. 아침 일찍 오름에 다녀오길 잘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잠시 쉼표를 찍고 가는 거라 위안을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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