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4일 토요일

by 모조

화이트데이라고 합니다. 그저 제주 생활 열네 번째 날일 뿐입니다.


며칠 째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일정이 반복되고 있다. 짧게 인사하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 택시를 타고 다시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공항이 비교적 한산했다. 최근 이 시간에 공항에 오는 일이 잦아지는 것 같다. 출퇴근하는 느낌으로 공항을 오가는 것도 꽤 새로운 경험이다.

20200314_084247.jpg 이른 아침 제주공항, 여행 올 때면 항상 찍는 그 스팟에서.

역시나 제주는 차가 없으면 매우 힘든 곳이라는 걸 알았다. 분명 내가 공항에 도착한 이후에 친구는 출발 준비를 시작했고, 내가 탄 버스가 먼저 출발했고, 친구가 더 멀리서 온 건데 왜 친구가 먼저 도착하는 거지. 괜히 억울하네... 택시 탈걸 그랬나.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스타벅스 외도DT점을 한 번 더 갔다. 한라산 등반 이후에 탈수 증상에 허덕이던 나를 구원해준(?) 매장인데, 친구와 약속 장소를 찾다가 중간 지점을 골랐는데, 버스에 올라 지도를 다시 보고서야 그제 다녀간 그 매장이라는 걸 알았다. 이런 우연, 별거 아니지만 꽤나 인상 깊은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그때는 1층에만 있었으니, 2층으로 올라갔는데 창가 쪽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세차게 부는 바람 따위 무시하며 바다를 즐기기 좋다. 제주에 왔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20200314_092910.jpg 바람도 많이 불고, 구름도 많은 날이지만 스타벅스 외도DT 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꽤나 매려적이다.

제주도에 놀러 온 친구와 일정이 맞아 해안도로 따라 나들이를 떠났다. 친구가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해서, 제주에 온 뒤로 처음으로 관광객 모드로 고등어 쌈밥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가고, 해수욕장을 걸었다. 바람이 무척이나 강하게 불었지만 관광객 모드로 꼭 보고 말겠다는 사람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20200314_101957.jpg 갈치조림이랑 고등어조림 중에 고민하다 갈치조림은 이미 먹어봤으니 고등어조림으로.

바다가 보이는 카페, 레이지 펌프. 이미 인스타 포토스팟으로 유명한 카페다. 오래전, 양식장에 물을 길던 펌프실을 카페로 재생시킨 곳인데, 펌프실일 당시 끊임없이 물을 길렀을 때와 달리 조금은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카페로 변신한 걸 보면 '레이지 펌프'라는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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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 PUMP. 이런데 빌려서 친구들 초대하고 하루 종일 무비나잇이나 했음 좋겠다. 주차장도 넓던데.

보통 때라면 (포토스팟으로 유명한) 2층 통유리 자리를 잡을 수 없었을 텐데, 운 좋게 바로 자리를 잡았다. 바람 탓에 파도가 매우 맹렬하게 밀려오고 있었는데, 따듯한 실내에서 바라보니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3층(더 유명한 포토스팟은)은 천장이 뚫려 있음에도 건물 구조 상 바람이 완벽하게 차단된 덕분에 너무 확실해 따듯한 햇살 아래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본래 공간의 특성을 살리고, 액자 프레임만을 이용해 포인트를 주는 센스가 너무 좋아 한참을 머물렀다. 다행히도 다른 손님들이 오질 않아 더 오래.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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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 PUMP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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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인증샷을 남기는 2층의 오션뷰 스팟. 창가 앞에 옆으로 앉아서... 다들 아시죠? 카메라 보면 안되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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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 PUMP의 3층. 오른쪽 사진을 보면 벽에 남아 있던 흔적에 액자만 붙여 마치 클림트의 <키스> 같이 보이게 만들었다. 이런 센스 덕분에 이 공간이 더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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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토스팟. 인스타앱으로 수평/수직 조정 하고 싶다...ㅠㅠ 여기서도 저 의자에 다리올리고 옆으로 앉아서, 카메라 안 보고.. 우리 다 느낌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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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온 후로 바다를 본 적은 있지만, 해변을 제대로 걸은 적이 없었기에 친구와 함께 바람을 뚫고 곽지해수욕장을 거닐었다. 바람과 파도는 여전히 맹렬했지만,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했다. 참 신기하게도 계속 제주에 있었건만, 바다를 볼 때마다 다시금 다른 삶을 살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가능하면 더 자주 나와야겠다. 잠시만 머물다 돌아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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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고 싶었던 책방 앞에 내려줬다. 입구에서 내가 알던 이름과 달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책방이기에 상호명이나 프로젝트명을 바꾸셨구나 하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주인분이 나오시길래 인터넷에서 본 책방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야기를 건네었는데, 알고 보니 1주일 전에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어째튼 내 실수 덕에 우연히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실수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방의 운영 철학, 방식, 그리고 사장님이 이 공간으로부터 만들고자 하는 변화에 대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님의 바람은 나의 개인적인 꿈과 닿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아직 말 뿐인 그 꿈을 누군가는 한 걸음 내디뎌 현실에 그려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별거 아닌 서점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다시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공간이었고, 시간이었다. 감사함과 응원을 담아 내가 읽을 책 한 권과 조카님에게 선물할 동화책 한 권을 사들고 나왔다. 이런 공간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앞으로 책을 중심으로 하나의 마을을 변화시켜 나갈 주제넘은 서점을, 주제넘은 말이지만,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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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을 다녀온 하루 사이, 마당에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나무에 꽃망울이 많이도 맺혀 있다. 몇몇은 망울을 열어 꽃을 피웠다. 내가 하루하루 지나는 동안 꽃과 나무도 하루하루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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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활짝 열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봄을 맞이하는 노래(네, 장범준 님의 노래들입니다)를 크게 틀었다. 짐을 정리하고, 배달 온 계란을 냉장고에 넣고, 조금 늦은 점심으로 토스트를 차려먹고 나니 산책(혹은 운동)을 다녀온 친구들이 큰 소리로 'Welcome home!'이라며 환영해줬다. 나 홀로 텅 빈 집에 돌아온 게 아니라는 게 괜스레 기분 좋은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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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하루 안 먹었더니 그리워서 도착하자 마자 토스트부터 해먹었다.

오름 가는 길,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종종 물결이 치는 걸 보고는 무언가 안에 살고 있겠구나 했는데, 소금쟁이가 아닌 생명체를 드디어 발견했다. 물고기 두 마리. 금세 어두운 곳으로 사라졌지만, 여기에도 생명이 살고 있단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했다. 이래저래 봄이 오고 있다.


사흘 만에 찾은 어도오름. 오늘따라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초입에서 산책을 하고 내려오시는 어르신 두 분을 뵈었고, 오름을 도는 중간에 두 여자분이 오름에 소풍을 나오셨다. 여기서 이렇게 사람을 많이 만나기는 처음이다. 아마 지난 화요일 만난 어머니와 아이가 마중물이었나 보다. 오름을 돌다 보니 평소와 다른 게 느껴졌다. 뭐가 달라졌나 했는데 벌목을 하고 있나 보다.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잘려 정리되어 있었고, 원래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그루터기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산책로 관리 때문은 아녔으면 좋겠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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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오름 산책로가 오늘따라 더 아름답다. 어느새 푸르러진 잔디들과 새싹이 돋는 나무들이.


하늘이 정말 아름다운 날이었다. 바닷가에서는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춥게 느껴졌는데, 오름에 오르니 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준 덕분에 마음껏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진짜 너무나 아름다워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이런 날에 바로 집으로 가기 싫어 인근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집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카페는 총 세 곳. 봉성프리마, 영국찻집, 그리고 바람우편이다. 오늘은 중간 지점에 있는 봉성프리마를 먼저 찾았다. 가서 노키즈존인지, 휴일은 언제인지 확인하고 화이트데이를 맞아 마카롱 네 개도 주문했다. 노키즈존은 아니라고 하니 다음에 조카님이 오면 모시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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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하늘, 그리고 그 하늘만큼 매력적이었던 봉성리 터줏대감 카페 봉성프리마.


냉장고에 남아 있는 버섯들을 모두 모아 올리브 오일에 살짝 볶았다. 사이드 메뉴로 버섯 볶음이 있는 레스토랑을 가면 항상 시키는 편인데, 집에서도 그냥 좋은 버섯과 좋은 올리브 오일, 소금, 허브가 있으면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어 선호하는 메뉴다. 버섯의 종류에 따라 익는 시간이 다르니 단단한 버섯부터 차례로 순서만 잘 정하면 먹을만하다. 오늘은 조금 오버쿡 돼서 버섯의 숨이 많이 죽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20200314_191101.jpg 오늘의 저녁 메뉴, 마지막 남은 밑반찬들과 버섯볶음. 보기엔 좀 그래 보여도 진짜 맛있다.

친구들이 인근 명소(?) 중 한 곳인 미미슈에서 디저트를 사 왔다. 차 타고 시내 오가면서 슈가게가 있네 하며 지나쳤던 곳인데, 운동삼아 다녀오신 듯하다. 난 차가 없으면 아예 갈 생각조차 안 했을 텐데... 역시 러너들은 다르다. 초코, 바닐라, 한라봉, 딸기우유. 오랜만에 달달구리들을 먹었더니 어찌나 맛있던지. 평소에 디저트를 잘 안 먹는 편인데 정말 깨끗하게 싹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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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데이를 맞이하여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이루어진 저녁 식사 후, 오랜만에 게임판(도박판)이 열렸다. 제주 화투를 사용한 고스톱 한 판. 우리에게 익숙한 화투가 아니라 실수도 잦고, 맞게 친건지 확인하느라 평소보다 더 왁자지껄하게, 하지만 느리게 화투판이 진행됐다.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판을 접을 때 결과적으로 돈을 번 건 나뿐이었다. 무려 50원! 그저 노트에 적혀 있는 의미 없는 화폐였지만 괜히 뿌듯하다. 이 기분 그대로 한 턱 내면 손해가 나지만 그래도 행복할 것 같은 하루의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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