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날, 한 달의 절반, 보름이 지났다. 벌써 반이나 지났네 보다는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는 생각으로 지금처럼 계속 지내고 싶다.
한라산 다녀온 지 3일째인데, 처음으로 긴장을 풀고 잠들었던 탓인지 종아리 상태가 무척이나 안 좋다. 새벽과 아침에 자다 깨다를 수 번 반복한 거 같다. 오늘 오름을 다녀오면 조금 더 괜찮아 지길 바랄 뿐이다.
꿈을 참 많이 꿨다. 첫 번째 꿈은 회사에서 일하는 꿈이었다.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근데 딱히 문제 같지 않은데 다들 극성이다. 해결책이 비교적 명확하다. 거의 1+1=2 수준으로. 그런데 그 답을 두고도 계속 무의미한 싸움만 지속된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 회사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꿈이 끊겼다. 두 번째 꿈은 결혼하는 꿈이었다. 멋진 야외 결혼식장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신부님이 한 어른으로부터 선물을 받더니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아무래도 어머니 같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특유의 민트색 상자에 ‘Tiffany & Co.’ 로고만큼은 확실히 보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내 기분도 매우 행복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행복한 게 아니라 뿌듯한 느낌도 들었던 것 같다. 꿈을 꿀 때는 내 결혼식인가 했는데 어쩌면 아주 먼 미래, 내 딸의 결혼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나 아가 안 낳을 건데… 마지막 꿈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분 나쁜 꿈은 아니었는데 인상 깊은 꿈도 아니었나 보다.
언제부턴가 다른 음식은 딱히 먹고 싶지 않은데, ‘피자’는 이상하게 주기적으로 먹고 싶어 진다. 뉴욕을 다녀온 이후로 조금 더 심해진 것 같다. 어차피 아침 시간도 늦었겠다, 냉장고에 토마토소스랑 피자치즈도 있겠다, 피자토스트나 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났고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나폴리탄을 베이스로 한 피자토스트에 써니사이드업 에그프라이까지 곁들이니 어지간한 브런치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한상차림이 준비됐다. 이거 생각보다 먹을 만 한데? 자주 해 먹을 것 같다.
거미가 문 앞에 거미집을 쳤다. 근데 정말 대단한 게 사람들이 이동하는 동선을 피한 데다가 지붕과 돌담, 바닥에 있는 돌을 이용해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는 완벽한 건축물을 하나 만들었다. 얼마 전에 집에 들어와서 조심히 집 밖으로 내보내 준 거미가 엄청 작았던 것 같은데 저런 대단한 걸 만들어 내다니 놀랍다. 거미줄에 모기가 걸려 있는 걸 보면 이런 게 상생이구나. 사람들이 괜히 거미를 이충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아무튼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거미집의 위치를 잘 알려줘서 조심하게 해야겠다. 근데... 벌써 모기..?
오후에 일정이 있어 오전 시간에 일찍 오름을 다녀왔다. 이제는 어도오름에서 사람을 만나는 게 당연한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은 한 가족이었다. 노부부와 아들, 산책을 마치고 내려가시는 중이었고 나는 산책을 가는 중이었다. 내일은 어떤 분들을 만날지 궁금하다
점심은 가볍게 스팸과 김. 솔직히 흰쌀밥에 이것만큼 완벽한 조합도 없다.
오후에는 친구들과 같이 영국찻집과 새별오름을 가기로 했다. 봉성리에 머물렀는데 이 두 곳을 한 번도 안 다녀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기에 일부러 일정을 잡았다. 아쉽게도 영국찻집은 만석이라 발걸음을 돌려야 했고, 대신 조금 일찍 새별오름을 가기로 했다. 봉성리의 자랑(?) 중 하나인 새별오름은 매년 ‘들불축제’가 벌어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이쯤 되면 새별오름에 있는 억새에 불을 지펴 오름 하나를 다 태운다.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평생 한 번 꼭 봐야 하는 장관이 펼쳐진다고 한다. 들불축제 날에는 봉성리 전체에 마을 사람들과 제주도민, 여행객들로 새별오름이 보이는 모든 곳이 사람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 올해는 코로나 19 탓에 행사가 최소 됐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조금 여유롭게 새별오름과 나 홀로 나무를 다녀올 수 있었다.
새별오름 가는 길에 들른 나 홀로 나무는 포토스팟으로 워낙 유명한 관광지다. 너른 들판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뒤로 새별오름과 이달오름이 배경으로 펼쳐지는 곳이다. 가보면 저절로 사진을 찍고 싶어 지는 명소다. 성수기에는 입구 쪽 도로에 차들이 하도 많아 통행이 어렵다고 한다. 줄 서서 사진 찍으려는 사람이 많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때 가서 다행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그마저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였다.
새별오름을 오르는 길은 무척이나 가팔랐다. 능선을 눈앞에 두고도 숨이 턱턱 막히는 구간이 생길 정도다. 그나마, 개인적으로는 계단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강풍이 어찌나 불어대던지, 바람과 경사를 모두 이겨내려니 더 빨리 숨이 가빠지는 것 같다. 그렇게 어렵게 올라 능선에 오르면 탁 트인 경관이 펼쳐진다. 진짜 죽을 만큼 힘들게 아니면 꼭 한 번 올라가서 볼 만하다. 아래에서 푸른 하늘 아래 있는 새별오름을 올려다보는 것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새별오름에 올라 내려보는 건 또 다르니까. 올라가는 게 가파른 만큼 내려오는 것도 큰일이었다. 그나마 오른편이 경사가 완만한 것 같다. 올라왔던 길로 내려간다고 생각하면 진짜 줄 잡고 한 발 한 발 내려갔어야 할 듯하다. 오르기 전에도 그랬지만, 한 바퀴 돌고 내려와 다시 올려다보니 여기에 다 들불을 놓고 태운다는 게 상상이 되질 않는다. 이만한 오름을 다 태우는 거라면, 지금 머물고 있는 집에서도 그 불길이 보일 것만 같다. 그걸 가까이서 바라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축제가 하나 더 생겼다.
친구 덕분에 시내에 들러 고베식빵과 일용할 양식을 구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고 싶었던 카페에 들렀다. 카페 브리프(Cafe Brief).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는 걸 용케 알고 인증샷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감귤창고를 개조하고 내벽을 하얗게 칠한 카페는 스튜디오도 겸하고 있을 만큼 여기저기 포토스팟이 넘쳐난다. 채광이 워낙 좋아 오늘같이 날이 좋은 날이면 찍는 사진마다 인생샷을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또 카페 벽에 스노우 필터를 디폴트로 해둔 흑백사진을 즉석 프린트할 수 있는 스팟도 마련되어 있어 기념품 삼아 가져가기 좋다. 이래저래 기회가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와서 사진을 찍어주고 싶게 하는,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 덕분에 좋은 기억의 잔향이 머물 것 같은 카페였다. 메뉴들도 소름 끼치게 훌륭한 커피를 제공하는 건 아니지만 달달한 거 먹고 싶을 때 먹기엔 괜찮았는데, 직접 만들어 먹는 척할 수 있는 앙버터도 괜찮았다.(역시 발뮤다 토스터는 마법을 부릴 줄 안다.).
저녁시간에 손하나 까딱 안 했다. 제주에서는 처음인 것 같다. 친구가 만들어준 베이컨 양송이 크림 굴소스 볶음밥(혹은 오므라이스)은 진짜 너무 맛있었다. 오랜만에 게걸스럽게 먹는 게 뭔지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설거지도 친구가 해준 덕분에 저녁 시간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책도 읽고, 게임도 하고, 어제 사온 마카롱을 디저트로 먹으면서 편하고 풍성하게.
스플랜더에서 1승을 챙겼다. 이제 곧 떠날 예정인 친구들이 기 살려 주느라 져준 게 아닐까 싶지만, 어쨌든 생에 첫 승이 기록해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