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7일 화요일

by 모조

열일곱 번째 날, 아침부터 집이 분주했다. 2주를 함께한 친구 커플이 떠나는 날이자, 3,000만큼 사랑하는 조카님이 놀러 오는 날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친구들이 집을 나서면 방이랑 침구류랑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둘이 먼저 나서서 방청소도 하고, 먼지도 털고, 쨍한 햇빛 아래 침구류도 걸어줬다. 알고는 있었지만, 참 어른 같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귀하고 고마운 분들에 옆에 있다. 너무나도 감사하게.


어제부터 걱정이 많았던 인디언 텐트가 제시간에 딱 도착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햇빛에 바짝 말리고, 준비해둔 패드와 동화책을 먼저 넣었다. 이제 어제 봐 둔 인디언 인형만 딱 구해두면 준비 끝이다.

20200317_093104.jpg 혹시나 집에 가져가야 할 수도 있으니 수납이 쉬운 인디언 텐트를 준비했다. 저거 고르느라 쇼핑몰 앱 두 시간 켜 둔 듯..


오전 내내 친구들이 제주집에서 떠날 준비를 했다. 2주를 머물렀던 것 치고 정리는 또 금세 끝나버린다. 공항으로 가기 전에 남쪽으로 내려가서 용머리 해안도 갔다 올라갈 예정이라고 한다. 처음엔 그 용머리 해안이 용두암이 있는 해안을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산방산 쪽에 있는 멋진 해안절벽이라고 한다. 그 근처에서 밥을 먹을만한 식당과 바다 보기 좋은 카페 하나를 추천하고는 제주에 머무는 동안 용머리 해안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구글 지도에 마킹해뒀다. 짐을 다 정리하고, 딱히 특별할 것 없지만 진심이 담긴 인사를 전하고 배웅을 했다. 친구들이 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니 기문이 묘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혼자 있는 것도 기분이 묘하다. 일단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놓고 조금 더 분주히 움직였다. 그저 일상적인 일들을 하다 보면 이런 묘한 감정들이 가라앉곤 하니까. 청소기도 한 번 더 돌리고, 물걸레질도 하고, 쓰레기통도 다 비웠다. 종량제 봉투를 다 채우기 전이지만 일단 다 가져다 버렸다. 다 마치고 나니 허기가 좀 진다. 다시 일상적인 활동들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니 원하던 대로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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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트 위에 홀그레인 머스타드 얹고 치즈와 샌드위치 햄 얹어 먹으니 예상 밖의 JMT 조합. 밑반찬 해두길 잘했다 생각한 점심.


조카님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날이라는 걸 아는지 하늘이 무척이나 맑다. 공항에는 바람이 좀 불고 있는 듯 하지만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다. 비행기에 올라서 출발한다는 카톡을 확인하고 가볍게 햇반이랑 밑반찬들로 점심식사를 한 후에 오름으로 산책을 떠났다. 날이 좋다 보니 한라산이 무척이나 잘 보였다. 동생한테 제주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면 바닷가를 다녀오라고 해야겠다. 날이 너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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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부터 하늘이 참 맑았다. 오름에서 바라보는 한라산과 오름들이 이렇게 또렷하기는 오랜만이다.


산책을 마치고 어제 봐 뒀던 인디언 손뜨개 인형을 사러 봉성리 봄으로 향했다. 전부 수작업이니 비쌀 건 예상했지만 생각했던 범위를 살짝 초과했다. 원래는 남자 인디언 꼬마, 여자 인디언 꼬마를 모두 사려고 했는데... 일단은 남자아이만 샀다. 원래는 주문을 받으신 후에 작업을 시작하시기 때문에 며칠 정도 미리 주문을 했어야 하는 건데,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감사하게도 완성되어 있는 인형을 내주셨다. 감사히 잘 가져다 인디언 텐트에 고이 모셔야겠다. 조카님이 좋아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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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놀러 오는 조카님을 위한 선물, 인디언 인형과 주제넘은 서점에서 구매한 동화책.

친구들이 그렇게 분주하게 떠날 준비를 하는 와중에 또 몰래 선물도 두고 갔더라.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딱 보니 어젯밤에 인디언 인형 얘기를 했던 걸 기억하고는 남겨둔 듯하다. 감동의 쓰나미가 이런 건가. 정말 감사합니다.


조카님이 도착했다. 드디어 제주집에 왕림하셨다. 생에 처음 비행기도 타보고(매우 잘 탔다고 한다. 오히려 동생이 멀미를 했다고), 바다도 봤다고 한다(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해수욕장은 걷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다만 보고 오셨단다). 엄마랑 떠나는 첫 여행이라 코디도 커플로 맞췄단다. 매부는... 운전하고 짐 들고... 음...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유독 맑은 오늘의 햇살처럼 맑은 미소를 띤 채로 조카님이 오셨다. 제주 온 이래로 제일 크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조카님이 이제 막 걸음마에 재미를 느낀 터라 집 앞에 마당이 있는 걸 보고는 무척 즐거워한다. 아쉽게도 인디언 텐트와 인형, 동화책보다 앞마당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좋아하고 기뻐하면 그만이다. 아기의 웃음소리에 동생 내외도 잠시 걱정은 덜어두고 여기 오길 잘했다 라고 생각하는 게 느껴진다. 걸음마 연습하자고 막 껴안고 애교를 부리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한 명 씩 돌아가며 앞마당을 돌고 또 돌았다. 처음 밟아 보는 돌길, 그 돌들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도 마냥 신기한 것 같다. 한 걸음 한 걸음에 흥이 느껴진다.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해진다.



어느 집이나 그렇겠지만, 아기가 집에 오니 모든 것이 아기를 중심으로 세팅된다. 조카를 보자마자 신이 나서 조카님이랑 놀 생각만 하는 나와 달리, 동생 내외는 곧장 아기에게 위험한 것은 없는지, 위험할 곳은 없는지, 매의 눈으로 훑어보고 뜯어고친다. 일단 위험해 보이는 집기들은 다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다 치워야 한다. 그저 보기 좋으라고 꺼내 둔 소품들이 짐이 되고, 실용적이고 당장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예쁘게 보이고 이런 거 다 필요 없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부모와 삼촌이 이렇게 다르다. 난 그저 뭐하고 놀아줄지만 생각했지... 뭐... 나야 잘 놀아주면 그만 아닐까ㅎㅎ 아가 짐도 많다. 그냥 다 아가 짐이다. 아기랑 여행 다니는 게 참 어려운 일이구나.


어느 정도 짐 정리를 마친 후, 아기 밥도 먹이고 다 같이 봉성식당에 갔다. 동생 내외가 고기에 소주 한 잔 먹는 게 쉽지 않다 보니 같이 돌봐줄 사람이 있을 때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끔 아가를 우리 집에 맡기고 저녁을 먹을 때도 1순위는 고기일 정도로 동생이 고기를 워낙 좋아하는 데다가 맛있으니까. 이번에도 어른 셋이 가서 흑돼지, 백돼지 다 먹고, 열무국수에 찌개도 먹었다. 조카님도 옆에 앉아서 생에 첫 돼지고기도


지난번에 인사를 나눈 강아지가 이번에도 버선발로 마중 나왔다. 조카도 강아지가 좋은지 밥 먹는 중에 여러 번 나가서 같이 놀아 달라고 했다. 물론 고기 냄새를 맡은 댕댕이가 적극적인 애정표현(?)을 하자 자기보다 덩치가 크다는 걸 깨닫고는 살짝 긴장하기도 했지만.(그 이후로는 계속 피하더라.) 그래도 한참을 멀리서 계속 지켜보고 잔디밭에서 계속 강아지 쫓아가자고 그 작은 고사리 손으로 나를 끌고 가더라. 덕분에 고기 먹으면서 운동도 하고, 조카님이랑 마음껏 놀았다.


집에 다시 돌아오신 조카님, 처음 보는 게 많아서 그런가 모든 게 신기하다는 듯 하나하나 만져보고 기어 다니느라(바닥이 딱딱할 텐데... 아플 텐데...) 졸린 것도 잊으신 듯하다.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닌 덕분인지 걱정한 것과 달리 새로운 집과 패드에서도 잠이 들었다. 이불은 챙겨 오라고 하길 잘한 것 같다. 아기가 곤히 잠이 들고 나니 그제야 어른들의 시간이다. 그 시간에도 모든 행동과 대화의 중심은 아기다. 일단 제일 먼저 하는 것도 아기 용품 정리고, 그러고 나서 하는 것도 아기와 갈 수 있는 장소를 찾고 정하는 거다. 그래도 마냥 좋다. 빨리 아침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다음은, 아기가 좋은 꿈을 꾸면서 푹 자고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짧다, 무조건 짧아), 조카님과 함께 하는 2박 3일. 좋은 추억만 가득가득 채워 갈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