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9일 목요일

by 모조

열아홉 번째 날이자, 조카님의 짧은 제주여행이 끝나는 날.


동생 내외와 조카님이 인천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공항으로 배웅도 가고, 나간 김에 시내를 둘러볼 예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침 일찍 오름을 다녀와야 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나 홀로 일어나 어도오름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오름을 오른 건 처음이다. 이제 막 올라온 해님의 햇살이 나무 사이로 아름답게 내리쬔다. 덕분에 한라산과 주변의 오름 능선들이 한층 더 눈에 띈다. 가끔 이렇게 이른 아침에 올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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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다녀오니 조카님 울음소리가 들린다. 잠에서 방금 깬 듯하다. 아침 인사를 나누고 동생 내외가 아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어른들이 먹을 아침식사는 내 몫이었다. 조식 메뉴는 크림치즈 애플 토스트.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레몬과 시나몬 파우더 따위 없으니 라임으로 대체했다. 계란 요리도 건너뛰고 그냥 시리얼로 배를 채웠다. 아가랑 함께 하는 여행은 정리할 짐도 많고, 이것저것 챙길게 많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흐르다 보니 느긋하게 조식을 즐기기는 어려웠다.


관광지를 다녀오는 대신 집 안에서, 앞마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는 날이라는 걸 아는지 안아달라고, 앞마당에 걸으러 가자며 애교 부리는 횟수가 늘었다. 어제 사온 바람개비와 비눗방울 덕분에 밝게 웃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인천 집에서는 밖에 나가기 어렵다 보니 마당 있는 집에 오니 계속 걸어 다니고 싶어 하는 걸 보는데 마음이 안 좋다. 아기들이 밖에서 마음껏 놀지도 못하는 작금의 상황이 너무나 슬프다.


공항으로 가는 길, 어느새 점심을 먹을 시간이라 제주김만복 본점에 들러 전복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사실 서울에서도 원하면 먹으러 갈 수 있는 메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제주에 오면 한 번은 들렀다 가는 곳이다. 공항이랑 가까워 첫날이나 마지막 날에 들리는 우진해장국 같은 곳이다.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차에 있어서 답답했던지 내리자마자 또 손가락을 꽉 잡은 채로 걸어 다니자고 난리다. 동생 내외가 체크인하고 가방을 맡기는 동안 제주공항을 아장아장 열심히 걸어 다녔다. 시간이 조금 남아 아기 점심밥도 먹이고, 기저귀도 갈고 탑승게이트로 가려는데 검표 중에 문제가 생겼다. 체크인 때 티켓이 조카 이름으로 되지 않고 동생 이름으로 되어있다고 가서 티켓을 바꿔오라고 했나 보다. 다행히 일찍 도착했던 터라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다. 보안검색대로 들어가는 세 가족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나왔다. 조심히 잘 돌아가면 좋겠다.


저녁 예약이 되어 있는 식당 근처로 이동했다. 유명한 그러므로를 갈까 하다 사람들에게 너무 알려진 곳은 피하고 싶어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근데 이 동네 은근 부촌인가 봐… 차들이 다 좋네. 아무튼 동네를 정처 없이 떠돌다 RUBATO라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선곡 좋고, 분위기 좋고, 목재를 기본으로 한 인테리어도 마음에 든다. 시원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 케냐 원두로 내리는 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조용한 곳에서 내 커피가 경쾌하게 그라인딩 되는 소리를 듣고, 카페 공간을 가득 체우는 커피 향을 느끼고, 얼음 잔에 담기며 얼음을 녹여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이제는 집에서 매일 경험하는 과정이지만, 이렇게 밖에서 경험하다 보면, 얼마나 호사를 누리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어 좋았다.

아이스커피 다 먹고도 밀린 숙제들을 끝내기 위해 꽤 오래 카페에 머물렀다. 저녁 먹을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기도 했고. 중간에 테이스팅 할 수 있게 커피를 조금 주셨는데, 이걸 어린 왕자 잔에 담아 건네주신 순간 여기서 원두를 사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100g씩 두 정류의 원두를 샀는데, 25g씩 두 개나 또 보너스로 주셨다. 이래저래 너무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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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센 탓에 비행기가 많이 흔들렸다고 한다. 많이 울었다는데, 주변에 있는 분들이 많이 힘드셨을 것 같다. 그나마 비행시간이 짧아서 다행이다. 아무튼 조카님 고생하고, 동생 내외도 고생이 많았을 듯. 그래도 잘 도착했다고 하니 마음이 편하다. 이제 다시 내 템포를 찾아야겠다.


하루빨리 우리 모두 일상이 제자리를 찾길 바란다는 카카오톡의 안내 메시지에 괜히 마음이 울적하다. 진짜 하루빨리, 모두의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오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모레 올 친구들의 아침식사를 위해 식빵을 사러 가는 길, 더 바디 샵이 보여 입욕제를 하나 질렀다. 집에서는 샤워젤을 더 바디샵 그레이프프루츠로 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프레그넌스를 거기에 맞춰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목욕용품이 다 라벤더 베이스라 입욕제도 비슷하게 라벤더 오일로 맞췄다.

얼떨결에 최애 빵집이 된 메종 드 쁘띠뿌르에 가서 감자식빵이랑 우유 식빵을 사고, 마침 예술전문서점이 근처에 있다고 해서 캔북스에 잠시 들렀다. 화방 겸 미술 공부방 겸 미술서적 전문점으로 사용되는 곳인데, 주인분께서 호크니를 매우 좋아하시는 것 같다. 판매 중이거나 전시 중인 미술 관련 서적 중에는 현대 미술 관련 서적의 비중이 높았다. 그중에서도 호크니 비중이. 최애 화가인 반 고흐 관련 서적은 두 권을 찾았는데, 그중에서 가격과 이후 다른 아티스트들의 아트북을 컬렉션 하기 용이한 TASCHEN의 책을 하나 기념으로 구매했다.

... 역시나 난 스트레스를 받으면 돈 쓰는 걸로 푸는 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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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다 마쳤는데도 저녁식사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이번에는 기왕 온 김에 그러므로를 들렀다 가자는 생각에 카페 앞까지 갔는데 6시까지만 영업하신단다. 저녁 예약시간이 7시라 한 번 더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을 것 같아 발길을 돌려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카페 앞에 도착해보니 문이 닫혀 있다. 종이에 아가가 아파서 병원에 가셨다고 적어두셨다. 얼마나 가슴 조리며 떠나셨을까. 아이가 빨리 완쾌하길. 아무튼 두 번째 후보까지 실패한 후에 지도에 찍어뒀던 카페들을 하나하나 알아봤는데 대부분 6시까지만 영업한다고 되어 있어 다시 한번 머물 곳을 찾아 방황하다 제일 먼저 보이는 카페에 무작정 들어왔다. 샌드위치 전문점이라 맛있는 빵 냄새가 가득한 곳이었다. 허기 진 상태라 그런가, 메종 뜨 쁘띠푸르에서 빵을 사기만 하고 먹지는 않아서 그런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빵 냄새가 너무 좋았다. 그 빵 냄새를 지우기 싫어서 커피가 아닌 사과 케일 주스를 시킬 정도로 그 빵 냄새가 좋았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여기서 샌드위치 꼭 먹어보고 싶다.


카페에서 스시야까지 도보로 15분 거리라고 한다. 버스를 타도 비슷하게 걸리거나, 배차간격을 못 맞추면 늦을 판이라 걸어갈 생각으로 조금 일찍 카페에서 나섰다. 해가 지면서 날이 조금씩 추워지자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고, 그 탓에 예약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스시 요코우에 도착했다.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국가나 도시에서 머물 때면 미식 관련 경험에 돈 쓰는 걸 아끼지 않는 편이다. 먹는 건, 비싸면 비싼 이유가 있다는 걸 맹신하는 사람에 속한다. 특히 스시가 그렇다. 일정 금액을 넘겨야만 제공할 수 코스의 구성이나 맛, 히노키 다찌, 셰프들의 실력이 보장된다고 믿는 편이다. 스시 요코우도 이런 생각에 매우 부합하는 곳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데다가, 다른 손님들이 예약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신 덕분에 셰프님과 잠시 얘기도 나눌 수 있었다. 제주 신라호텔에서 일하기 전에 독일에서 스시를 쥔 적이 있다는 이야기나 제주에서 추천하실 만한 식당이나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 코스 한 코스, 한 메뉴 한 메뉴, 한 점 한 점 정성껏 대접해 주시는 메뉴들을 즐길 수 있었다. 예약한 손님들이 다 온 후에는 조금 더 형식적인 대화가 오갔던 터라, 초반 몇 가지 코스에서 나눈 대화가 스시 요코우에서의 경험을 더욱 특별하게 해 줬다. 제공하는 코스는 정통적인 갖춤새를 지키는 듯했다. 스시나 사시미도 좋았지만, 요리들도 워낙 훌륭해 기억에 남는다. 샐러드부터 복튀김, 백된장을 이용한 삼치조림까지. 하나하나 다 훌륭했다. 역시, 먹는 데에는 돈을 아끼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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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하고 알찬 구성을 보여준 스시 요코우의 저녁 오마카세 (17만원)

생각보다 식사가 일찍 끝나긴 했지만(손님이 남자 셋이다 보니 먹기도 빨리 먹었고, 그 속도에 맞추다 보니 대화나 소개가 점점 줄어들면서) 혹시라도 막차를 놓칠까 싶어 택시를 타고 제주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다행히 차가 출발하기 5분 전에 도착했고, 로또를 하나 사들고 버스에 올랐다. 이 시간에 버스 타고 집으로 향한 건 처음이었다. 만약 필라테스를 다녔다면, 꽤 자주 이런 루틴이 반복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는 필라테스를 못 다니게 된 게 무척이나 짜증 나는 일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됐다 싶다. 이런 일상을 살았어도 즐거워하고 좋아했겠지만, 지금껏 누려온 삶과 병행하긴 쉽지 않았을 거다. 이런 게 전화위복인 건가.


워낙 이른 시간에 조용해지는 동네라 10시가 다 돼서 걷는 봉성리는 적막하기까지 했다. 어두운 시골길을 지나 집이 있는 골목에 접어드니 마당의 조명 빛이 멀리서부터 나를 반긴다. 정말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조카네가 분가를 했던 날처럼, 떠들썩하던 집이 너무 고요하다. 음악 소리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적막이 싫어 일부러 TV 소리를 크게 키워뒀다. 그리고 제주에 와서 처음으로 야식을 차려 먹었다. 이렇게 공허하고 외로울 때면 항상 야식을 먹는 편인데, 지금이 그런 순간인가 보다. 후다닥 먹고, 후다닥 정리하고, 3일간 찍은 사진과 영상들을 잠시 보고 얼른 자야겠다. 내일부터는 다시 3일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