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3일 월요일

by 모조

스물세 번째 날, 봉성리 한 바퀴.


이른 시간에 친구들이 공항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 일찍 토스트를 준비했다. 시간이 없으니 계란 요리는 프라이로 간단하게. 토스트를 굽고, 커피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리고, 테이블 매트 위에 토스트와 계란 요리, 수저를 놓으면 준비 끝. 이제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아침의 루틴이다.


친구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아니 보지 않았던 곳들에 시선이 간다. 정문 위로 보이는 대나무라던지, 한옥집으로 향하는 길에 핀 꽃이라던지, 매일 드나들며 수십 번 봤던 집 앞마당마저도 다르게 다가온다.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았나 보다.


날이 좋았다. 잠시 거실에 누웠다. 바람에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걸 보며 김동률 님의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진짜 완전 환상의 조합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또 딱 점심시간이다. 진짜 완벽한 오전이었다. 남아있는 밑반찬들 다 꺼내서 점심식사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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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분리수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봉성리 탐방로' 안내판을 본 적이 있다. 그걸 보고 나서, 한 달이나 살았던 동네니, 지금 머무는 곳뿐만 아니라 동네를 주~욱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꽤 의미 있은 일이겠다 싶어 가야지 가야지 했는데 이제야 돌아볼 수 있게 됐다. 원래는 조금 일찍 떠났어야 했는데, 낮잠도 잔 데다가 요즘 삶의 절반은 차지하는 것 같은 <모여봐요, 동물의 숲> 때문에 출발이 늦어졌다. 그래도 3~4시간이면 도는 코스라고 하니 일몰시간 보고 조금 서두르면 해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해가 좀 지면 어떻냐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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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익숙한 어도오름으로 향했다. (어도오름도 코스에 있다.) 가는 길 그리고 오름을 한 바퀴 돌면서 코스 지도도 다운 받아두고, 나보다 먼저 탐방을 다녀온 분들의 글을 통해 대략의 루트를 그렸다. 그리고 오름을 내려와 계획했던 루트대로 탐방을 시작하자마자 그렇게 어디 있나 궁금했던 어도오름 비석이 눈 앞에 딱 나타났다. 날도 무척이나 좋고, 뭔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출발이 좋다. 맞다, 출발만 좋았다.


탐방로가 관리가 하나도 안되어 있다. 제주 올레길 한창 유행할 때 수많은 지자체가 만들어냈던 세금 낭비 행정 중 하나인 것처럼, 분명 탐방로 안내판 따라 시작했는데 길이 없다. 개인 사유지를 지나야 하거나, 원래대로라면 물길이었을 곳을 지나야 했다. 한참을 가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은 아닐 거 같아 되돌아오느라 한 시간을 허비했다. 안 그래도 늦게 출발했는데... 여기서 한 번 좌절...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길이 아닌 둑을 따라 사유지를 지내보는 걸로 마음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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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만 해도 무척 들떠있었다. 날이 좋아서 한라산도 다 보이고, 보리밭이 많아 얼마나 푸르르던지.


그래도 조금 지나니 탐방로를 다 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리해서 다시 출발하길 참 잘했다 싶었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걸어 다닐 맛이 난다. 탐방로가 아니더라도, 아무도 없는 시골길을 거닐며 지금까지 보지 못한 풍경들을 만나고 하늘도 바라보면서 점차 페이스를 올렸다. 오길 잘했다는 말을 수십 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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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풍경 구경하느라 정신없이 걷는 중간중간 탐방로 안내판에 적혀 있던 지명을 네이버 지도에 검색해가면서(심지어 안내판의 명칭과 지도의 명칭이 달라서 비슷한 것들 중심으로 유추해가며) 나만의 탐방로를 만들다 보니 중간중간 실제 탐방로의 안내판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어찌저찌 봉성리 탐방을 이어갈 수 있었다. 채 절반도 못 온 거 같은데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갈 건지, 다시 돌아갈지 결정해야 했다. 해지면 아무것도 안 보일 테니까. 왔던 길 따라 집으로 돌아갈래도 1시간 반은 걸릴 듯 하니 그냥 가보기로 했다. 뭐, 정 안되면 택시 타고 돌아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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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로 안내문을 만나고 나서야 확신했다. 아, 이건 지금 더 이상 관리하지 않는 탐방로구나.. 내 의심이 옳았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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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또 페이스를 끌어올려서 걸으며 마주하는 풍경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냥 돌아갔으면 진짜 후회했을 거다. 진짜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며 저절로 기분도 좋아졌다. 그래도 이젠 현실적으로 동선을 틀어서 집으로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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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왔던 길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면 못 봤을 풍경들.


급하게 숏컷을 찾아 집으로 향했으나, 해가지는 것보다 더 빨리 뛰진 못했다. 하필이면 숏컷이 시골길이라 가로등조차 없어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다녀야 했다. 태어나서 꿩이 이렇게 무서운 동물이라는 것도 이날 처음 알았다. 겁이 많은 건지, 쉬다가 놀란 건지, 푸드덕 오르면서 막 우는데, 소리가 진짜 얼마나 크던지. 깜짝깜짝 놀랐다. 간 떨어진다는 게 뭔지 알겠더라. 진짜 컨저링 장롱 박수에도 이렇게 놀라진 않았던 것 같다. 꿩은 또 얼마나 많던지, 너댓번 간 떨어질 만큼 놀랐던 같다. 어둠을 헤매다 저 멀리 가로등이 보일 때 얼마나 반갑던지. 가로등까지 전력으로 뛰었다. 졸아서 그런 게 아니다. 혹시나 꿩이나 다른 동물들에게 폐를 끼칠까 싶어서 그랬다.


집으로 가는 길, 바람우표라고 이전부터 봐 뒀던 북카페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는 곧장 들어갔다. 따듯한 게 먹고 싶어 그린티 라테를 시키고, (연관성 하나도 없지만) 따듯한 게 읽고 싶어 <언어의 온도>를 꺼내 들고 자리를 잡았다. 일상 속에서 이런 발견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지게 하는 책이다. 짧은 시간에 후다닥 100페이지를 읽었다. 시간 여유가 조금만 있었으면 다 읽고 갔을 텐데, 너무 늦게 온 탓에 여기서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에 독립서점 했던 지인이 놀러 오면 다시 한번 와야겠다. 그때 다 읽어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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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도 충분히 긴장 풀고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도착해서야 제대로 긴장이 풀렸나 보다. 샤워하고 나와서 스마트워치를 봤는데 생각보다 별로 안 돌아다녔다. 2만 보도 못 채웠네... 아무튼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산책이었다. 행복한 오후였어.


많이 움직였으니, 든든하게 먹어야지. 남아있는 스팸과 두부, 고추장, 청양고추를 모아다가 스팸 고추장찌개를 만들었다. 근데 이게 진짜 너무 맛있게 잘 됐다. 밥 두 공기, 찌개 두 대접 다 먹었다. 진짜 완벽한 저녁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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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고추장찌개, 진짜 완전 대박 성공적.

하루 종일 날이 좋았던 데다가 어제 나섰던 밤 산책의 여운이 남았던 탓인지, 별을 보러 나섰다. 저 멀리 행사가 있는지 아니면 비행기들의 라이트인지 모르겠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빛이 반짝반짝 움직인다. 그 불빛이 지나고 나니 또렷하게 별들이 보인다. 어제보다 더 잘 보인다. 큰일이다. 밤 산책에 맛 들이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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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카메라로도 별이 선명하게 찍히는 기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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