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번째 날, 오랜만에 관광객처럼 열심히 돌아다녔다.
머물고 있는 한옥집에서 영상 촬영이 있다고 해 일찍부터 밖으로 나섰다. 어제 차 시간을 다 확인해두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획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그 덕분에 하루를 조금 더 길게 즐길 수 있었다. 10시 배를 예약해놨는데, 8시 30분에 항구에 도착해버렸다. 매표소에 가서 10시 예약 취소하고 9시 배로 발권했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배에 올라 가파도로 향했다.
가파도는, 지난번 2월 초에 왔을 때와 달리, 푸르른 섬이 되어 있었다. 코로나19만 아니었어도 한창 청보리축제를 준비하고 있을 시즌이라 그런지 섬이 한층 아름다웠다. 현대카드 프로젝트 관련 시설의 개보수로 인해 공사차량이 조금 다니고 있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가파도의 모습이 기대했던 만큼 아름다웠기에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지난번 방문일이 휴일이라 못 들렀던 가파도 스낵바에 들러 버터 뿔소라 구이로 아침을 먹고, 섬 탐방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그랬지만, 가파도는 참 아름다운 섬이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넓게 펼쳐진 청보리밭이 말도 안 되게 아름답다. 2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섬인 건 맞지만, 2시간으로 만족스럽게 둘러볼 수 있는 곳은 절대 아니다.
가파도 청보리밭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파도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온다. 바다는 많이 봤지만 이렇게 파도가 돌에 부딪치며 내는 차분한 파도소리를 듣기는 참 오랜만이다. 저절로 걸음이 느려진다. 다들 청보리밭 쪽으로 거닐고 있어 오가는 사람도 없다. 저 멀리 마라도도 보인다. 햇살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빛난다. 배 시간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면 하루 종일 있고 싶은 섬이다.
가파도 AiR은 또 한 번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걸 다음에 또 한 번 가파도에 올 이유로 삼아야겠다. 다음에는 꼭 1박 2일로 아트인레지던스랑 레스토랑까지 다 즐기다 가야겠다. 혼자 오지 말고, 대화할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와야겠다.
뱃시간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걸었더니 발목 상태가 조금 안 좋아졌다. 그나마 다행히 용머리해안으로 가는 버스 기점이 근처라 일찍 버스에 가서 쉴 수 있었다. 산방산에 도착해서 알아보니 용머리해안은 탐방이 1시 반부터 가능해서 점심을 조금 일찍 먹기로 했다.
사계리 동네 식당, 사계의 시간. 장어요리를 하는 곳이다. 사장님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식당인데, 9시에 오픈해서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는다. 메인 메뉴는 장어덮밥. 특별한 맛은 없는데, 진솔한 맛이다. 가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입지도 입지거니와 사장님께서 혼자 하시기에 가능한 가격이다. 덮밥이랑 같이 장어탕을 조금 주시는데, 정말 든든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용머리해안으로 향했다. 여러 말이 필요 없는 절경이다. 지구와 시간이 만들어낸 예술품이었다. 혹자가 한국의 그랜드캐년이라는 말을 했는데, 솔직히 그건 그랜드 캐년을 안 다녀와서 그런 걸로 치고, 그냥 느낌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데는 백번 동의할 수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풍경인 건 같으니까. 그냥 해안로 따라 돌고 오면 금방 다녀올 거리지만, 열심히 카메라에 담느라 꽤 오랜 시간을 해안길을 따라 걸으며 보냈다. 몇몇 포토스팟에서는 치열한 자리 경쟁(?)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혼자 온 내게는 그림의 떡과 같았다. 물도 맑고, 절벽도 훌륭하고, 날도 좋고, 모든 게 다 좋았다.
사계리로 넘어와 동네 서점인 어느, 바람에 들렀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에는 기왕이면 동네서점에서 책을 사고 싶었고, 마침 독립출판물만 파는 책방은 아니었던 터라 어제 읽었던 언어의 온도를 열심히 찾아봤는데, 결국 찾지 못했다(사장님 찬스도 실패). 아쉽지만, ‘여행의 이유’를 사고 싶진 않아서 패스.
오픈 때부터 눈독 들여뒀다 어쩌다 보니 방문이 늦어진 사계 생활. 폐점한 농협 지점을 ‘로컬 여행자를 위한 콘텐츠 저장소’로 바꾼 대표적이 제주도 지역재생 프로젝트 사례다. 간단한 카페 메뉴와 제주의 로컬메이커들의 작품,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곳으로, 여전히 처음에 지향했던 바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가게다. 들어오면서 사람이 없어서 차분하게 즐길 수 있겠구나 했는데, 착각이었다. 고등학생? 같은 여자분 네 분이 계셨는데, 어마 무시한 셔터 소리와 연사 소리로 정신을 쏙 빼놓으셨다.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도대체 뭘), 이 정도라니… 혼자서, 둘이서 두 조로, 셋이서, 넷이서 번갈아 가면서 스튜디오처럼 온 카페를 누비고 다닌 후에야 겨우 조용해졌다.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 상황이다. 도대체 왜 누가 스마트폰 카메라 촬영음을 필수로 해둔 건지, 오늘만큼은 찾아서 한 마디 하고 싶다. (물론 왜 때문에 그렇게 된 건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버스 시간에 맞춰서 다행히, 꽤 차분한 분위기에서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었다. 느긋하게 판매 중인 MD들도 둘러볼 수 있었고, 평상시 같으면 독립서점에서 샀을 JIIN 매거진과 사계 생활의 리미티드 에디션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하나 씩 들고 두 손과 마음을 풍족하게 한 채로 집으로 향했다.
봉성리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내가 사랑한 공간들>을 조금 더 읽었다. 보안1942는 그 어떤 편보다 진심으로 동감하며 읽었다. 중간에 나도 모르게 끄덕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만큼은 다 읽었다. 오늘따라 버스 시간이 딱딱 맞는다. 매일 이러면 진짜 차 없이 다닐만하다, 제주는.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내가 조금 늦게 도착해서, 두 분 중 한 분이 짐만 내려둔 채 동네 산책을 떠나야 하긴 했지만) 형님들이 도착했다. 한 분은 정말 오랜만에 뵙는 지라 더 반가웠다. 이렇게 일을 벌이니 이렇게 만나고 참 좋다. 이래서 내가 매년 생일파티랑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거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인사 나누고 숙소 안내를 마치고 나서 시간을 보니 오름을 다녀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형님들께 양해를 구하고(사실 내가 없어도 즐겁게 잘 노실 분들이기에) 오름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계속 날씨가 좋았던 데다가, 어제 산책 다니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버릇이 되어 그런가, 오름을 오가는 길도 오름도 더 아름다웠다. 매일 이런 풍경을 못 보고 지나쳤었나 하는 아쉬움과 이제라도 보게 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해 질 녘에 이렇게 다니는 것도 좋구나. 가기 전까지 더 자주 보고 싶은 풍경들이다.
저녁에 한옥집의 야경 촬영을 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형님들과 같이 봉성식당으로 향했다. 어느새 세 번째 방문이다. 형님들도 무척이나 맛있게 드셨다. 특히 고사리무침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는데, 이미 두 분이서 맥주를 16캔이나 드신 후라 배가 불러 고기는 더 못 먹어도 고사리는 더 먹겠다고 추가 주문까지 하셨다. 너무 좋아하셔서 남은 거까지 포장해왔다. 집에서 이루어진 2차 술자리에서도 고사리무침이 메인 안주였을 정도로 좋아라 하시더니, 내일 또 가자신다. 오늘 흑돼지 먹었으니 내일은 백돼지를 먹어야겠다.
집에 와서 한 번 더 술판이 벌어졌다. 두 분은 이미 기분 좋게 취하신 상황이었건만 술이 또 들어간다. 술 안 먹고 취한 친구들 텐션 맞춰 노는 거 잘하는 지라 나도 저절로 텐션이 올라간다. 형님 중 한 분이 <미스터트롯>에 꽂혀서 트로트 크게 틀고, 그 음악소리보다 더 크게 왁자지껄하게 저녁 시간을 보냈다. 제주에 온 이래, 제일 왁자지껄하게, 즐겁게, 미친 듯이 놀았다. 혼자였다면 절대 끌어올리지 못했을 텐션으로 쭈욱 달리고 또 달렸다. 술기운에 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하고(술 한 모금 안 마셨지만, 두 분이 충분히 취하셨으니...ㅎㅎ), 취중 방송도 하고, 이래저래 즐거운 시간이다.
두 분은 아직도 달리는 중이다. 일기 써야 한다고 방에 들어와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조용해진다. 내일 언제 일어나시려나. 이제 나도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