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번째 날. 평소와 같은, 별다를 게 없는 날처럼, 어느 때보다 일상적인 삶을 보내겠다 다짐한 아침이 밝았다. 이런 다짐을 해야 한다는 것부터 이미 평범하고 일상적인 날이 아닌 거지만, 일어나서 아침 준비해서 먹고,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한 후에 햇살을 맞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빨래를 돌리고, 점심 식사를 준비해서 먹고, 티타임을 갖고,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오름을 다녀오고, 다시 와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메인 요리를 준비하고 저녁 한 상을 차려 먹고 설거지를 하고 듣고 싶은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잠이 들기 전까지 집에 머물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잠들어야겠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반복했던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싶은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른빨래를 게고, 아침 요리에 필요한 것들을 바리바리 챙겼다. 양옥집에 들어가서 BGM 틀고, 조금은 낯선 주방에서 하는 다섯 명의 아침을 준비하는 건 생각보다 즐겁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스크램블드 에그에 계란 10개(버터 조절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조리하는 게 생각보다 엄청 힘들었다), 토스트 6조각, 알아서들 잘라먹으라고 불친절하게 그냥 내보냈다. 과일도 손이 더디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다 차려놓고 보니 보기 좋더라. 이렇게 같이 먹으니 더 좋더라.
한 팀은 마라도로 짜장면을 먹으러 갔고, 한 팀은 공항으로 떠나기 전 짐 정리를 하는 중에 홀로 훌쩍 오름을 다녀왔다. 점심을 같이 먹고 보내려 후다닥 다녀왔는데, 렌트가 반납 시간이 애매해서 잠깐 수다를 떨다 공항으로 가는 길을 배웅했다.
배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남아 호박이랑 두부를 이용해서 전을 부치고, 남아있는 밑반찬들도 점심을 차려먹었다. 마지막 점심이니까 푸짐하게, 잘 차려먹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과 함께한 하루였다. 옆집에서 키우는 닭 중에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어 나왔다. 우리 집 대문 앞에서 떡하니 자리를 잡아 당당하게 서있었는데, 사실 다시 둥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아 보였다. 잡아서 올려주고 싶었는데, 피부병이 난 건지 싸움의 흔적인지 깃털이 뽑혀 있어서 잡을 용기가 나질 않더라. 나중에 조사를 좀 해보니, 이게 수탉이 나쁜 짓을 한 거라더라. 암탉 수가 적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그걸 알고 나니 돌려보내는 게 맞나 싶기도 하더라. 아무튼 한참을 수풀 속에 숨어 있었는데, 다시 돌아갔는지 더 이상 울음소리가 들리진 않는다. 부디 무사히 잘 돌아갔길.
친구들이 오기 전에 청소랑 짐 정리를 끝낼 생각이었다. 언제나처럼 Apple music의 플레이 리스트를 켜 두고, 폴딩도어와 창을 모두 다 열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까지 하고 일어나 집을 한 바퀴 둘러보다 문득 지금이 마지막 기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침실로 들어가 카메라를 꺼내왔다.
매일 아침 토스트를 해 먹고, 커피를 내려먹었던 부엌.
폴딩도어를 활짝 연 채로 누워 책을 읽고, 게임을 하고, 달콤한 낮잠을 자거나 수다를 떨었던 거실.
매일 아침 새들이 노래하고, 풀과 나무가 프루고 풍성해지고, 꽃이 아름답게 피고 지고, 꿩과 고양이, 이제는 닭도 산책을 오고, 무엇보다 조카님이 아장아장 걸어 다녔던 앞마당.
참으로 오랜만에, 진짜 오랜만에, 새벽에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침실.
한 달 동안 많은 분들이 오가며, 집안의 온기를 더해 준 게스트룸까지.
이 모든 순간을, 모든 공간의 흔적을 사진 속에 담았다. 그러고 나서 조금씩 집에서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내일 오전까지 필요한 것들만 남겨두고 모두 다 치워내고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이른 시간부터 섬 반대편에서의 여행을 마친 친구들이 돌아왔다. 얼마 전 가파도에 갔던 날과 동선이 꽤 비슷했던 터라 꽤나 힘들지만 즐거운 시간이었겠구나 지레짐작이 된다. 저녁 시간이 코 앞이라 냉장고에 있던 분홍 소시지와 밑반찬들을 모두 꺼내 상을 차렸다. 이곳에서 먹는 마지막 저녁 치고는 조촐했지만, 그냥 일상적인 상차림이라 더 좋았다.
별을 보고 싶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따듯한 물에 들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별을 보고 싶었다. 하늘이 흐려 안 보일 거 같았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후, 가득 채워진 물 위로 프렌치 라벤더 오일도 잔뜩 뿌리고, Billie Eilish의 노래를 틀고, 탄산수를 손에 쥔 채 밝게 빛나는 야외 욕조로 들어갔다.
밤에 즐기는 노천욕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사방팔방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자랑하며 노천욕을 즐겼다. 아... 진짜 30일 만에 처음으로 "여길 왜 혼자 왔지" 싶었다. 올해 제일 잘한 일이자, 올해 제일 잘못한 일인 것 같다. 이곳에 혼자 온 거.
얼마나 지났을까, 도무지 하늘이 갤 것 같질 않았다. 혹시라도 조금 더 어두우면 별이 보일까 싶었다. 집안에서 쉬고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불을 다 꺼달라 부탁했다. 주변의 빛을 모두 차단해도 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둠이 사방을 감싸며 다른 감각들이 한층 예민해졌다. 스피커에서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나 주변의 향과 냄새, 물이 닿는 촉감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지난 한 달을 돌이켜 봤다. 행복하고 좋은 일들만 떠오르더라. 별을 보고 못 보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그 순간 나는 분명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현재를 즐기고 있었을 거다. 어느 순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끝나고, 잠시 찾아온 완전한 침묵을 깨고 욕조에서 나왔다.
바쁜 일정을 보낸 친구들이 먼저 잠이 들었다. 내일 또 일찍부터 움직여야 하니 조금 일찍 잠을 청한 듯하다. 조용히 뒷정리를 마치고, 남아 있는 선토리 위스키와 토닉을 이용해 하이볼을 만들었다. 마당에 나와 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텅 빈 집 안에 사람들이 머물렀던 한 달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한 편의 영화처럼. 회상이 멈춘 순간, 남은 술을 모두 비우고 침실로 들어왔다. 노트북 밝기를 최대한 낮춘 채 글을 적는다.
방에 들어온 이후, 여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그리고 이제, 그만 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