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날, 다시 한번 루틴 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하루이자 제주에서의 마지막 주말을 시작 한 날.
여독이 남아 있는 탓인지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날이 맑았다면 햇빛에 저절로 눈이 떠졌을 텐데, 비까지 내리고 흐린 날이라 한없이 침대에 있기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다 평소보다 2시간가량 늦게 침대에서 나왔다. 평상시처럼 아침을 준비하는데 계란이 다 떨어져 가고 있어서 계란을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점심 메뉴를 급하게 바꿨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계속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폴딩 도어를 열고, 비가 나무데크에 떨어지는 소리와 재즈 음악(Apple music에서 Rainy day Jazz 플레이 리스트)을 켜놓고 책을 읽었다. 책이랑 정말 멀리 지내는 사람인데, 두 권의 책이 마지막 챕터들만 남았다.
친구가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한다는 얘기와 함께 배가 고프다는 얘기를 하자마자 엄마 모드로 변신했다. 냉장고를 보니 버섯들이 조금 남아 있었다. 올리브 오일에 버섯을 살짝 볶았다. 이번에도 상대적으로 텍스터가 강하고 질긴 버섯과 마늘을 먼저 먼저 볶고, 팽이버섯을 제일 마지막에 넣었다. 조리를 다 마친 후 바질 살짝 뿌려주면 이게 진짜 밥도둑이다. 식감도 좋고, 빵이랑 먹어도 좋다. 빵이랑 먹을 때는 홀그레인 머스터드나 잼을 바른 후 샌드위치처럼 먹으면 이게 또 환상이다.
제주에 온 첫날, 궂은 날씨를 뚫고 픽업을 나와줬던 동생이 한 번 더 집에 들러줬다. 두 번 놀러 온 친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날이 흐리네. 급하게, 그러나 정성스레 준비한 점심을 같이 먹고, 차 한 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화의 메인 토픽은, 새로운 인연에 대한 고민상담이었다. 제주도에 가는 걸 알린 후부터, 첫날 집에 데려다주는 내내 대화에 등장했던 사람이 한 명 있었은데, 뭔가 느낌적인 느낌이 있어서 혹시나 고민의 상대가 그분인지 여쭈어보니 그분이란다. 고민의 포인트가 꽤나 명확했다. 그러다 보니, 철저히 내 입장에서 고민에 대한 답도 꽤 명확했다.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이미 답정너인 상황에서 한 번 더 자신의 마음을 굳게 다질 수 있는 응원(?)이 필요한 것 같았다. 아무튼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걸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난 그걸 잘 못하는 터라 그런 친구의 모습이 멋있고, 부럽더라. 그러니 더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 지고.
아무튼 내 생각은 클리어하게 전달했고, 친구도 마음이 굳게 선 듯하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연락 주기로 했다. 그리고, 잘 된다는 전제 하에, 8월에 있을 생일파티에 놀러 와 소개해주는 것도 약속했다. 아마도 8월 생일파티에서는 새로운 커플 한 쌍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가 떠나고 날이 조금씩 개는 것 같아 오름으로 산책을 떠났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벚꽃이 한층 더 만개한 것 같다. 벚꽃을 구경하려 고개를 어도초등학교 쪽으로 돌렸는데, 분위기가 이전과 다르다. 어느새 잔디가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그리고 한동안 갈색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연두색으로 변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꽃이 피어 봄이 온 줄 알았는데, 잔디를 보니 봄이 짙어지고 있다는 걸 한 번 더 느꼈다.
비 온 뒤 방문한 오름은 한결 더 푸르르고 생기가 가득했다. 풀내음도 한층 짙고. 아, 미끄럽기도 훨씬 미끄럽다. 이미 예전에 한 번 제대로 넘어진 적이 있었던 만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러웠는데, 몇 바퀴 돌다 보니 금세 적응됐다. 물론 지난번에도 이러다 자 빠진 거긴 하지만, 날이 슬슬 어두워지는 것 같아 조금 발걸음을 빨리 해서 정해진 수를 채우고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선에 올라 쉬고 있던 한 무리의 새가 동시에 날아오르며 장관이 펼쳐졌다. 그 모습을 기록하고 싶어, 혹시나 한 번 더 날아오르지 않을까 하며 찬바람을 맞아가며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으로만 담을 것 같았던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괜스레 뿌듯하다. 오늘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슬슬 냉장고를 정리해야 한다. 새로운 식재료를 사 오기보다는,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들을 갖고 창의적인 메뉴들을 만들어 내야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친구들이 두고 간 크림소스. 그 위에 토스트 해 먹겠다고 사뒀던 피자치즈와 모차렐라 치즈였다. 여기에 스팸이랑 남아 있는 버섯들을 넣어서 크림치즈 리소토를 해 먹어야겠다. 올리브유 살짝 두르고, 스팸이랑 버섯, 남아있는 밥을 다 넣고 살살 볶다가 크림소스를 냅다 부었다. 거기에 모차렐라 치즈 얹고, 피자치즈까지 얹은 후에 뚜껑을 덮고 치즈가 녹을 때까지만 기다려주면 완성. 주물팬이라 바닥에 있던 밥들은 누룽지처럼 눌어붙어서 꽤나 매력적인 리조또가 완성됐다. 물론....... 양도 많고... 크림도 많고... 치즈도 많아서....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냉장고에 있던 김치까지 비울 수 있었다. 배부르게 먹고 냉장고도 비우고 일석이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