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폴(The Fall)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해석
한강 작가는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고,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더 폴>의 주제 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질문을 약간 비틀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허구의 이야기가 현실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이다.
허구가 실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타셈 싱 감독은 일말의 의심 없이 “그렇다”라고 답한다. 본 작에서 로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내리면서 추락의 의미를 뒤집고, 자신을 구원한다. 이는 서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의미를 표현한다.
로이는 추락(the fall)한다. 그는 스턴트맨이기 때문이다. 추락하는 것은 스턴트맨의 주요 업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한 버스터 키튼의 위험천만한 스턴트 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스턴트맨은 건물에서, 철로에서, 말에서 추락한다. 로이의 마음 또한 끝없이 추락한다. 로이는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연기하다가 불구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애인은 바람을 피웠다.
알렉산드리아는 추락한다. 그녀는 가난한 이민자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어머니를 도와 오렌지를 수확하는 노동을 한다. 그녀는 나무 위에서 추락했다. 로이를 위해 찬장에서 모르핀을 꺼내다가 추락하기도 했다. 남을 도우려는 선의 때문에 그녀는 추락한다.
추락하는 로이와 알렉산드리아, 그들은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다. 로이는 불구고, 알렉산드리아는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이민자다. 추락은 그들이 처한 수난을 설명하는 장치이자, 그들의 낮은 지위를 상징한다.
허구란,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꾸며내는 것이다. 만들어진 이야기의 본질은 허구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는 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더 폴>은 거짓말의 집합이다. 영화 그 자체가 허구이기도 하거니와, 본 작은 액자식으로 구성된 이야기들로 점철됐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는 능숙하게 이야기 짓기, 즉 거짓말을 한다.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이 하는 거짓말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로이와 달리 알렉산드리아는 언제나 타자를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녀는 로이의 발가락을 잡을 때 거짓말하고, 의사의 말을 어머니에게 옮길 때 거짓말한다. 어머니와 의사, 로이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다. 반면,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에게 상처를 줄지언정 자살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을 말한다. 모르핀을 먹으면 잠을 잘 잔다는 말도, 알렉산드리아에게 들려준 이야기도 자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허구 그 자체가 아니라 허구의 목적이겠다. 어떤 이야기를 써 내릴 것인지가 중요하다. 이야기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로이가 자신을 죽이기 위한 이야기를 쓰고, 알렉산드리아가 타인을 구원하기 위한 이야기를 쓴 것처럼 말이다.
로이는 죽음을 택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한다. 마치 그가 첫 번째로 풀어놓은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병사들과 사막 한가운데에 고립된 알렉산더 대왕은 투구에 담긴 물을 사막에 버린다. 로이에 따르면, 적은 양의 물을 소수의 사람이 독점하는 것보다는 모두가 갈증에 시달리다 죽는 편이 공평하다. 따라서 그는 죽음을 선택한다. 불완전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한편,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에게 “왜?”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한다. 그녀는 불완전한 삶을 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를 듣고선, 적은 양의 물이더라도 병사들과 조금씩 나눠 마시는 게 낫다고 주장한다. 알렉산드리아는 언제나 삶을 선택한다. 로이의 세계관이 이해될 리 만무하다.
알렉산드리아는 질문한다. 그녀가 로이에게 질문을 던질 때, 로이의 이야기는 조금씩 변화한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는 "신부님은 착한 사람이니 막대기로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로이는 "신부님이 막대기를 주운 까닭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울뱀을 치우기 위함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 내용을 바꾼다.
인간은 타인과 언어를 공유하면서 자아를 확립한다. 정신분석 과정이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내담자(환자)는 상담자가 자신이 가진 증상의 원인을 밝히고 이를 제거함으로써 치료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 상담자는 내담자의 증상이 지닌 원인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 상담자는 그저 내담자와 대화를 하면서 그가 삶을 재해석하도록 유도할 뿐이다. 내담자의 부정적인 기억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한 믿음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라캉 정신분석 이론의 핵심이다.
알렉산드리아가 로이에게 던지는 질문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 “왜 모두를 죽여야만 하나요?”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질문에, 로이는 “그것이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라고 단호히 답한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는 “그것은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라고 응수한다.
상담자는 죽고자 하는 내담자로 하여금 그가 죽지 않도록 새로운 믿음을 심어주는 일을 한다. 로이의 과거가 실제로 어땠는지,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로이를 포함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왜곡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삶에 대한 믿음을 만드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어린 알렉산드리아는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믿을 수 없는 화자’이다. 본 작의 관람객이 스크린을 통해 본 이미지는 온전히 알렉산드리아의 시선에 의존한다. 그것은 로이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은, 알렉산드리아가 상상해 낸 결과물이다. 현실과 허구의 이미지가 융화되는 것처럼 알렉산드리아의 삶에 대한 태도가 로이의 이야기에 점차 스며든다.
이야기의 독자였던 알렉산드리아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마음의 장벽을 허물었다. 그녀는 작가로서 로이의 이야기에 참여한다. 로이의 이야기에 들어가, 그 자리를 점차 넓혀간 알렉산드리아의 삶에 대한 신념이 결국 로이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꺾는다. 로이는 죽기를 포기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한다.
로이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본다. 로이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영화에 삽입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몇몇 사람들은 그 영화를 두고 "쓰레기 같다"라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로이는 영화를 즐겁게 감상하는 알렉산드리아를 보며 웃는다.
로이가 웃음 짓기 전까지, 추락은 로이에게 그저 불행의 원인이다. 그러나 로이가 영화를 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마주하고, 인정함으로써 추락의 의미가 뒤집히게 된다. 영화 연출의 수단에 불과했던 스턴트맨은 스스로 뛰어내리기를 선택한 주체로 거듭난다. 마치 손키스를 보내면서 물로 뛰어드는, 버스터 키튼의 영화 장면처럼 말이다.
인간의 본질은 '만드는 존재'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자신의 삶을 계발하는 유(類)적 존재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서사화하는 이유다. 라캉에 따르면, '자아'는 주체를 통해 계속 말을 걸어야 하는 근원적인 채워지지 않음이다. 말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림으로써 자아를 확립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는 살기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를 지어내고, 가장 재미있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멈춘다. 그렇게 그녀는 천일 동안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아남았는데, 이야기에 매료된 왕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그녀에게 이야기란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나, 종국에는 이야기가 그녀에게 삶을 선물하였다.
로이도 마찬가지다. 알렉산드리아를 매개로, 로이는 자신을 살리기 위한 이야기를 쓴다. 로이가 죽음을 포기할 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한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결말을 만든다. 본래 로이는 자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야기를 지어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야기는 믿음을 넘어, 존재 그 자체로 거듭나 로이를 살아남게 했다. 허구가 실재를 구원하였다.
<더 폴>은 메타(meta) 영화다. 본 작은 에드워드 마이어브리지의 <달리는 말>과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으로 시작하여, 버스터 키튼의 위험천만한 스턴트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사(史)를 장식하는 작품들을 수미상관으로 배치한 것만 보아도, 본 작이 영화 산업 자체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각건대, 창작을 한다는 건 기꺼이 추락하는 일이다. 우리는 내가 만든 창작물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고통받는다. 그럼에도 결국 창작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몸을 내던진다. 추락이 고통을 수반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그것을 선택하는 스턴트맨이 그러하듯이.
스턴트맨뿐만 아니라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촬영감독, 스태프, 음향 연출자, 미술감독, 프로모션 담당자 등-은 영화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하지만, 이름을 알리지 못한 채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린다. 이들이 만든 창작물이 반드시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추락하는 일을 선택한다.
<더 폴>은 추락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 써 내린 헌정 시다. 허구를 통해 구원받아 현실을 살아내는 존재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이야기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토대로 이야기를 써야 하노라 말한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야기, 더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