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만 가는 사진들, 잊혀 가는 문장들
어느 날 문득, 인터넷을 배회하다가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블로그’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마치 전시회나 화보집을 구경하러 온 듯한 느낌 말이다. 거대하고 선명한 이미지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글이라곤 사진 사이사이를 메우는 몇 줄의 문단이 전부였다. 그것도 줄 바꿈을 꽤 많이 해서 길어 보이는 착시효과가 있을 뿐, 정작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았다. 이게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텍스트 기반의 미디어’가 맞나? 한때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정보를 나누고, 생각을 펼쳐나가던 공간으로 여겨졌던 블로그가 언제부턴가 한 편의 ‘사진첩’으로 변모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감각적인 이미지는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 힘이 있다. 맛집을 소개하는 글이라면 군침 도는 음식 사진 한 장으로 이목을 끌 수 있고, 여행 블로그라면 현지의 아름다운 풍광이 담긴 사진 몇 장만으로 훌륭한 “미끼”가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사진으로 유혹한 뒤, 과연 한 단계 더 깊은 정보와 생각을 전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안타깝게도 많은 한국의 블로그, 특히 이른바 ‘파워 블로그’라 불리는 공간조차 이미지에 과도하게 의존한 채, 정작 텍스트가 해야 할 ‘전달’과 ‘표현’은 소홀히 해버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반면 해외의 블로그들을 살펴보면, 문장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독자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사진은 어디까지나 그 글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무르고, 핵심은 텍스트다. 그들이 말하는 자신만의 철학, 음식에 관한 짧은 에피소드, 여행 중 마주친 삶의 방식 등은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하나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 사람의 관점과 감정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마치 장편 소설의 한 장면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이와 같은 차이는 한국의 텍스트 기반 콘텐츠 소비량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OECD 국가 중에서도 현저히 낮은 독서율을 기록하고, 성인 열 명 중 여섯 명은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통계는 꽤나 씁쓸하다. 그러니 긴 글을 읽어내는 습관 자체가 부족하고, 자연스레 블로그조차 이미지 위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심지어 제품 상세페이지 형태를 보면 더욱 극명한 차이를 알 수 있다. 국내 쇼핑몰은 한없이 긴 이미지 스크롤로 이어지는데, 해외 사이트나 아마존 같은 플랫폼은 텍스트 설명을 훨씬 비중 있게 배치한다. 스펙과 디테일, 사용 후기까지 텍스트를 통해 낱낱이 설명하고, 이미지는 그저 이 텍스트를 보완할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글’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플랫폼이 아예 없진 않다. 예를 들면 ‘브런치’ 같은 곳. 적어도 여기서는 글쓰기를 하나의 작업으로 여기고, 문장을 조립하듯 단어를 고르고 문맥을 맞춰 나간다. 정보 전달도 정보 전달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감성을 담아낸 글이 마치 디지털 시대의 정성스러운 손편지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시장 논리다. 사용자가 적으면 이런 텍스트 중심의 플랫폼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공간들이 지켜지길 바란다. 조금 느리고 번거롭더라도, 글이라는 매체가 가진 깊이와 온기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한다.
블로그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사진을 붙여놓고 거기에 양념처럼 몇 줄의 텍스트만 얹어두는 게 진정 블로그가 지향해야 할 모습일까. 우리 안에 잠든 ‘읽고 쓰는 힘’을 깨워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이미지를 뛰어넘어, 글로써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해 내는 그 본연의 매력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꿋꿋이 ‘글’을 고집하는 이들의 노력이 더 많은 공감을 얻고, 더 널리 퍼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진짜 블로그 시대가 다시 찾아오길 희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