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반코 고티티 G1, 군고구마의 달콤함
퇴사한 지 어느덧 2년. 처음엔 해방감과 동시에 찾아온 막연한 불안감에 매일 마음이 뒤숭숭했다. 적어도 아침에 커피를 내릴 때만은 그 어지러운 생각을 잠시 비워두고 싶었다. 그 시간이 내게는 작은 의식이자, 자신을 다독이는 소중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창문으로 따스한 겨울 햇살이 들어오면, 난 천천히 원두 봉지를 꺼낸다. 오늘은 에티오피아 반코 고티티 G1 워시드, 카페뮤제오에서 구매한 특별한 친구다. 봉지를 여니 군고구마를 떠올리게 하는 달콤하고 구수한 기운이 따라온다.
오크 손잡이가 달린 코만단테 핸드 그라인더에 원두 20g을 넣고 돌릴 때마다, 조용한 방 안이 사각사각 갈리는 소리로 채워진다. 천천히 갈린 원두가 투명한 통에 모이면,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기분이다. 갈린 원두를 오리가미 드리퍼에 깔아 둔 웨이브 필터 위에 부을 때, 톡톡 떨어지는 고운 갈색 입자가 주는 안온함이 있다.
곧이어 주전자를 들어 300g의 물을 천천히 붓는다. 한 번에 확 붓기보단, 일단 가볍게 물을 부어 향을 깨워주는 이른바 ‘블루밍’의 과정을 거친다. 필터 위 원두가 ‘부풀어 오르는’ 순간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마치 여유와 따스함이 내 안에서 차오르는 것 같다. 가만히 지켜보는 사이, 풍미를 머금은 물방울들이 바닥의 서버에 맺힌다. 그 맑은 커피빛을 보면, ‘오늘도 잘 살아보고 싶다’는 소박하지만 강한 다짐이 생긴다.
생각해 보면, 회사를 관두고 프리에이전트로 나선 건 내게 유례없는 선택이었다. 그 뒤로 찾아온 불안과 고단함도 결코 가볍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주말 늦은 아침에 이 향긋한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며 느끼는 잔잔한 행복은 예전엔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각이다. 물론 여전히 일과 수입은 불투명하고, 매일같이 크고 작은 걱정들이 나를 찾아온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점은, 그 모든 불안조차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나는 불안을 부정하거나 피하고 싶어 했다면, 이제는 그 안에서 작은 틈을 찾아 ‘나만의 속도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면, 과일처럼 톡 쏘는 산미와 함께 군고구마를 떠올리게 하는 달콤함이 입안을 감싼다. 머금고 있으면 그 단맛이 혀끝에 오래 머문다. 내가 노력하고 애써온 시간들이 이렇게 은은한 단맛으로 돌아오는 건 아닐까, 그런 기분이 문득 든다.
그리고 이 커피 한 잔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원두를 고르고, 갈고, 물을 부어 추출하는— 그 모든 시간이 곧 내 삶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뜨거운 물이 부어지듯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고, 때로는 필터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순수한 액체로 정제될 수 있듯, 우리 인생도 그런 과정을 겪으며 조금씩 맑아지고 깊어지는 게 아닐까.
오늘은 그렇게 조용하고 포근한 아침에, 내가 내려 마신 에티오피아 반코 고티티의 한 모금으로 마음을 달랜다. 여전히 앞날은 불투명하고, 신경 쓸 일도 많다. 하지만 이 커피가 내게 알려준 작은 위안과 잔잔한 행복은, 더 든든하게 오늘을 버티게 해주는 에너지가 된다. 내가 더 성장하고 있다는, 그리고 좀 더 단단해졌다는 증거를 머금은 채. 이 한 잔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조금 더 여유롭고 따뜻하게 펼쳐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