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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포트 Jan 23. 2024

쑥캐러 다니는 애 없는 미혼녀


봄이 가져다준 '나의 작은 숲'


어릴 적부터 봄만 되면 늘상 하던 일이 있다. 바로 엄마와 함께 쑥을 캐러 가는 것! 세상이 기분 좋은 온기로 가득해 질 때쯤이면 우리 엄마는 어김없이 ‘비야, 엄마랑 쑥 캐러 안 갈래?’하고 물으시곤 했다. 그럼 나는 귀찮은 티를 내면서도 기어이 따라나서곤 했다. 그렇게 검은 봉다리에 과도 하나를 챙겨 이 향긋하고 푸른 것을 찾아 온 동네 천지를 쑤시고 다니는 것이 우리들이 봄을 맞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독립을 하고 서울서 살고부터는 ‘봄을 맞는 법’을 잊고 살았다. 바쁜 일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땅히 쑥을 캐러 갈 만한 곳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그런데 세종으로 내려오고, 연이어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시간적 여유와 더불어 마음의 여유까지 생겼는지 별안간 쑥 캐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따뜻한 봄바람을 타고 나에게 휘리릭- 날아온 것이다. 나는 쑥을 꼭 캐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예전처럼 봉다리와 과도를 하나씩 챙겨서 동네에 쑥이 있을 만한 곳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지인에게 쑥 플레이스(이하 '쑥플')를 찾는 것이란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오랜 기간 쑥파인더(쑥을 찾는 사람, 쑥finder)로 활동한 경험자답게 유동 인구, 쑥의 질 등을 따져가며 제법 깐깐한 기준을 들이대는 바람에 30분이 지나도록 마땅한 쑥플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쑥플 찾기는 이제 그만 포기를 해야 하나 싶어 발걸음을 집으로 돌리고 있을 때였다. 집 뒤편 저 멀리에서 나무로 우거진 신비로운 입구를 발견했다. 누가 봐도 그 속에 풀과 나무가 가득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곳에는 깨끗하고 향긋한 쑥이 지천으로 널려있을 게 분명했다.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할 때 ‘유레카!’를 외쳤듯 나는 이곳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저기다!’하고 외쳤다.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다.


나는 입구로 보이는 그곳을 지나 나무 사이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의 중턱에 다다랐다. 막상 앉아서 쑥을 캐려고 하니 괜스레 멋쩍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치를 한참을 살폈더랬다. 마침내 마음을 먹고선 쑥이 보이는 곳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아 본격적으로 쑥을 캐기 시작했을 땐, 제법 집중해서 연신 쑥을 캐고 있는 내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낯설었다. 남들은 다 회사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쳐다보고 있을 이 시간에 혼자 숲에서 쑥을 캐고 있다니. 이 상황이 우스워 실없는 사람처럼 피식거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거기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침 뱉고 개들이 오줌 싸는 곳이라 쑥이 더러워~ 여기 말고 저~쪽에 가면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곳이 있어요. 거기로 가봐요. 거기 쑥이 많아~”


어디서 나타나셨는지 모를 한 아주머니께서,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본 일이 한두 번이 아닌듯한 MBTI 극 E(외향형) 냄새를 풍기시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잊지 못할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그래도 기특하네. 이런 곳에서 직접 쑥도 캐고. 젊은 엄마가.”


젊은 엄마가. 젊은 엄마가. 젊은 엄마가.(에코 효과)

분명 한 번만 말씀하셨는데 ‘젊은 엄마’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마치 이장님이 마을회관에서 안내 방송 하실 때 '여러분'이라고 한 마디 하시면 꼭 세 번은 여러분. 여러분. 여러분. 하고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나는 쑥을 캐서 먹일 자식도 없는 데다가 심지어 결혼 근처에도 못 가본 처녀인데,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느라 아주머니 말씀의 핵심 메시지를 잠깐 놓치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충격으로 집 나간 정신을 다시 데려와 억울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는 젊은 ‘엄마’가 아님을 굳이 부정하거나 바로잡지 않고 그저 허허 웃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고선 등산객들의 침과 개 오줌이 묻었을지도 모르는 한 움큼의 쑥을 과감하게 버리고 아주머니가 말씀하신 '저~쪽'으로 갔다. 정말로 그곳엔 사람도 별로 안 다니도 쑥도 지천으로 나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다시 쑥을 캐기 시작했다. 아까 들은 젊은 엄마라는 단어가 생각나 피식거리기도 하면서, 그래도 앞에 ‘젊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주셔서 다행이라며 자기 합리화도 해가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금세 내 머릿속은 쑥으로 만들어 먹을 음식 생각으로 가득 찼다. 쑥 부침개를 해 먹을까, 쑥 튀김을 해 먹을까, 아니면 쑥 된장국을 해 먹을까 고민하다 보니 금새 봉다리 속이 한 움큼의 쑥으로 가득 찼다. 성실한 노동과 제법 따뜻해진 날씨에 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이 느껴질 때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온전한 행복감이 피어올랐다. 얼마 만에 흘려보는 땀인지,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나의 작은 숲에서 캔 쑥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직접 캔 쑥으로 쑥 부침개를 해 먹었다. 그리고 아주 행복한 식사를 마치며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내가 지난 10년 동안 쫒았던 있어 보이는 명함이나 높은 지위가 아닌,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자연의 곁에서 자연이 주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는 것.

자연 안에서 자라나는 것들을 보며 나도 함께 성장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깊은 감사와 행복을 느끼는 것.

봄 여름 가을 겨울 다를 것 없이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봄이 오면 '봄이 왔구나' 하고 으레 봄에 하는 일들을 하는 것.

그런 것들이 나에겐 필요했던 것이다.


구 직장 동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들과 퇴근 후 시원한 맥주를 마심으로써 하루 동안 쌓였던 피로를 씻어내리는 것보다, 하루의 피로를 가중시키더라도 풀 냄새, 나무 냄새, 흙냄새를 맡으며 쑥을 캐는 것이 더 좋았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 듯 뻔질나게 숲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


쑥부침개와 얼음 동동 띄운 매실음료



* 다음 글: <나의 작은 숲과 사계절 – 여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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