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의 워케이션을 가장한 발리 여행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그런 흔한 기회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여행을 하기 위해서 바쁜 일상으로부터 얼마 간의 귀한 시간을 어렵게 얻어 낸다. 그렇게 우리는 오랜 기간 꿈꿔왔던 여행지를 둘러보고, 낯선 풍경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찰나의 자유를 누린다. 우리에게 이 시간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래서 이 기간만큼은 단 한 시라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은, 여행의 기회가 귀하면 귀한 사람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커지리라. 우리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시간 동안 일분일초가 아까워 여행이 시작되기 전부터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미리 계획을 세운다. 여행이 시작되고 난 후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관광지를 둘러보고 빡빡한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난 후에는 녹초가 된 육체의 피로를 풀기 위해 마사지를 받기도 한다. 그래야 다음 날에 체력을 회복하여 일정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일분일초가 아까운 여행 기간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처럼 보낸다면 어떨까? 관광지를 둘러보는 대신 언제나처럼 일을 하고, 마치 동네를 산책하듯 낯선 여행지를 산책하고, 동네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듯 여행지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어쩔 때는 늘어지게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이러한 여행을 동경해 왔다.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나를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평소와 같이 생활하는 그런 부조화스러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누가봐도 현지인이 아닌 외모를 하고서 낯선 장소의 일상으로 스며드는 것이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재미야? 그런 거는 한국에서도 할 수 있어' 또는 '그럴 거면 도대체 여행을 왜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번 여행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들었던 말이기도 하니까. 글쎄다. 나는 왜 이런 여행이 좋은 걸까?
이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한 디지털 노마드가 워케이션을 가장하여 발리로 여행을 떠나 일상적인 하루하루를 보내며 경험한 것들을 써 내려간 여행기다. 특별할 것 없지만 새로운 것 투성이고, 이게 여행이 맞나 싶으면서도 드문드문 떠오르는 일탈의 기분에 감탄하기도 하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발리에 집착하기 시작한 지도 어언 2년. 왜 하필 발리여야만 했을까. 수년 전 본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주인공이 열렬히 사랑을 했던 곳이 인도네시아 발리여서? 직장인 시절에 출장차 방문한 인도네시아의 기억이 그토록 좋았기 때문에? 아니면 오랜 기간 말로만 명상 수련을 해 온 아가리 명상러인 내가 명상 수업을 들어보겠다는 것을 핑계 삼아 자칭 타칭 영적 도시라 불리는 발리의 우붓으로 현실도피하고 싶어서? 이렇게 알 듯 모를 듯 한 이유를 품은 채로 발리에 대한 나의 집착은 나날이 집요해져만 갔다. 한 번 입 밖으로 꺼낸 소망은 주워 담을 수 없는 욕망이 되어 점점 부풀어만 갔다. 가족이나 지인들과 대화를 하다가 여행 그 비스무리한 주제만 나와도 나는 냅다 그 기회를 잡아 발리에 꼭 가고 말것이라며 주절거리곤 했다. 그리고선 아직 가지도 않은 나의 발리 여행을 정당화시키기라도 하듯 그곳에서 명상 수련을 하고 일도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재빨리 덧붙이곤 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나는 아가리 명상러인 데다 노트북만 있다면 어디서든 일 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이기에 장기간의 여행을 '수련'과 '업무 수행'을 곁들인 일종의 출장으로 둔갑시켜 오랜 기간의 자리비움과 거액지출을 정당화하려는 속셈이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사실 이는 여유롭지 않은 형편에 갑작스럽게 거액을 지출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설득하고자 하는 마음속 사전 작업에 더 가까웠다.
왜 꼭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발리여야만 했는지는 알 듯 말 듯 불명확했지만, 그곳에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해결될 리 만무한 미스터리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나는 적당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적당한 여윳돈을 모으고 여행을 위해 일정 시간을 비울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존버하며 성공한다고 했던가, 나는 프리랜서로 전향한 이래로 제일 큰 프로젝트를 따내었다. 이로써 여행을 위한 목돈 마련의 기회를 얻었고, 프로젝트에 착수한 후 두 번째 수금날에 드디어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발리행 왕복 비행기를 끊었다. 마침내 5개월 동안의 장기 프로젝트 대장정이 끝나고, 드디어 2주간의 짧고도 긴 발리 여행의 서막이 올랐다.
다음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