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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서 여행하기

디지털 노마드의 워케이션을 가장한 발리 여행기

by 모카포트



나는 어쩔 수 없는 호갱인가봐


발리 덴파사르 공항에 떨어졌을 때는 저녁 7시 무렵이었다. 입국 절차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도착비자와 발리 관광세 납부 등 번거로운 일들은 미리 온라인으로 처리해 두었으므로. 위탁 수하물도 문제없이 잘 찾았다. 모두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었다. 이제 호텔까지만 무사히 도착하면 이날 일정은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거였다. 나는 택시를 타기 위해 미리 다운받아 온 택시 어플 그랩(Grab)을 켜고 공항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게 뭐람, 공항 밖으로 발을 딛자마자 삽시간에 현지 택시 기사들에게 둘러싸여버렸다. 호갱(=바로 나)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했다. 순간 '아씨...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과 함께 불길함이 엄습했다. 여행 유튜버들을 보니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는 택시 기사들은 관광객들에게 엄청난 바가지요금을 씌운다던데. 나는 필사적으로 "현금 없다." "어플로 택시 부를 거다"라고 말하며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이들은 물러서는 법을 몰랐다. 그런데 마침(?) 나는 기계치였다. 앱으로 택시를 잡는 법을 도통 모르겠는 것이다. 그렇게 눈을 휴대폰에 계속 고정한 채로 아무리 물리쳐도(?) 좀비처럼 계속 나타나는 택시 기사들을 돌려보내느라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점점 지쳐만 갔다.. 오랜 비행으로 인해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마음처럼 쉽게 작동하지 않는 택시 어플과 계속해서 끈질기게 영업하는 택시 기사님들 덕분에 결국 정신적인 한계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역시 계획대로만 되면 여행이 아니지.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세상이 이끄는 대로 현실에 투항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결국 나는 자발적으로 호갱을 당하기로 했고, 얼마인지 모를 택시비(나중에 시가를 알고 나서 배 아플까 봐 환율 계산도 안 해보고 대충 지불한 후 기억에서 지워버림)를 지불하고 나서야 무사히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쨌든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으니 된 것이다.













일하면서 여행하기


발리에 오기 전, 거래처로부터 간단한 프로젝트를 하나 제안받았었다. 어차피 이번 여행에서는 일과 여행을 병행할 작정이었기에 나는 별 다른 고민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물론 거절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러기 싫었다. 초보 프리랜서라 작은 일감 하나하나가 귀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를 수락함으로써 드디어 꿈에 그리던 '여행하면서 일하는 삶'을 몸소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비록 짧은 여행 기간이기는 했지만 이번 여행이 앞으로 내 디지털 노마드 인생에서 펼쳐질 수많은 워케이션의 예고편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일이 없었더라면 조금 섭섭했을 것 같달까.


총 여행 기간은 2주였고 해당 프로젝트의 최종 마감일은 발리에 도착한 날로부터 4일 뒤였다. 다행히 많은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 아니었기에 즐길 시간 또한 충분했다. 그래서 사흘 동안 지역을 두 번 옮기고 호텔을 세 번 옮기면서도 차질 없이 업무를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일은 주로 아침시간과 저녁시간에 했다. 아침에는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며 느긋하게 일을 했고, 저녁에는 숙소에서 그날의 할당량을 마저 채웠다. 나중에는 해당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다른 거래처에서 작업 의뢰를 받아 하루 이틀 더 일하는 데 시간을 썼으며, 일정이 겹쳐 일부 프로젝트는 거절하기도 했다.


유목민처럼 이리 저리 흘러다니며 일하는 중


일하기 좋은 카페를 찾는법


발리에는 나 말고도 디지털 노마드가 아주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발리는 그 아름다운 자연경관 덕에 이미 전세계긴들에게 휴양지와 신혼여행지로 정평이 나있는 곳인 데다가 저렴한 동남아 물가와 여유로운 삶의 방식까지 누릴 수 있으니 말그대로 완벽한 워케이션 장소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갔던 카페 5곳 중 적어도 3곳에서는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간혹 카페 일하러 갈 때 나와 같은 노마드들을 보면 묘한 동질감과 이상한 안도감(노트북 하기 좋은 카페인가 싶어서)을 느끼기도 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카페를 전전하며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일하기 좋은 카페를 찾는 노하우가 생겼다. 가장 간편한 방법은 아무래도 인터넷에서 미리 노트북 하기 좋은 카페를 검색하여 가거나, 마땅한 곳이 없으면 오래 있어도 마음 편한 스타벅스를 가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카페가 멀리 있어 이동하기 곤란하다면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카페 안에 노트북을 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곳을 선택하면 웬만하면 성공이다. 이렇게 카페를 선정하는 이유에는 '노트북 하기 좋은 분위기'일 확률이 크다는 점도 있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왠지 안심도 되고 동기부여도 되기 때문이다. 한 날은 카페를 찾아다니다가 영 마땅한 곳이 없어 그냥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노트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한 남성이 카페 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몇 분 뒤에 내가 일하던 카페로 다시 돌아오더니 주문을 하고 슬며시 노트북을 꺼내 할일을 하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카페 선정 프로세스를 거치는 것 같았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카페에서 공부나 일을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카공족이네 뭐네 하며 한참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발리는 디지털 노마드들이 많이 머무는 워케이션 장소로 워낙 잘 알려져 있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카페도 많으니 소규모의 카페가 아니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눈치를 많이 살피는 편이라, 한 카페에서 2시간 이상은 머무르지 않고 혼자라도 메뉴를 여러 개 시켜 먹곤 했지만 말이다.



발리에 1일차 새벽, 호텔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일하는 중. 나무젓가락 없어서 객실에 있는 음료 젓는 스틱으로 젓가락을 만들어 썼다. (퇴실하기 전에 다 씻어 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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