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어 달라는 자 vs 사진 찍어 주겠다는 자
발리 여행 이틀차, 나는 아침 열 시쯤 호텔에서 나와 아름다운 석양으로 유명하다는 세미냑으로 향했다. 곧장 숙소로 가 짐을 풀고 난 후 근처 카페에서 남은 일 좀 하고 나니 시간은 벌써 4시를 훨씬 지나고 있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버렸지! 나는 세미냑의 석양을 놓칠까 싶어 부랴부랴 필요한 것만 챙겨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세미냑 비치로 갔다. 세미냑 비치는 얼핏 보면 우리나라의 여느 해변과 다를 것 없이 보이지만, 뜯어보면 그 규모가 더 웅장하고, 파도는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집어삼킬 것 같이 거침없었다. 가히 서퍼들의 천국이라 불릴만했다. 친구는 내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강원도 양양이 아니냐며 놀려댔지만, 세미냑의 해변은 어촌마을에서 나고 자란 내가 보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이국적이었다. 역시 장소란 직접 그곳에 당도하여 보고 맡고 느껴 보아야 비로소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목적 없이 해변을 따라 산책을 하고 있나니, 소년과 청년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이가 다가와 썬베드를 이용해 보지 않겠냐며 제안을 해왔다. 그러고 보니 썬베드가 해변 중앙을 따라 즐비해 있었군. 바다의 화려함에 정신이 빼앗겨 미처 보지 못했었다. 나는 그의 제안이 퍽 나쁘지 않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썬베드에 반쯤 누워있으니 진짜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하고선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와, 흩어졌다 붙었다를 반복하는 하늘의 구름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것 같던 파도와,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구름은 한국에 돌아온 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 한구석에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또 다른 이가 저 멀리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청년이었다. 또 무엇을 팔고 싶어서 그러나, 이제 뭘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는 사이에, 그는 벌써 이만치 와서 내 썬베드에 허락도 없이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청년) '너 그 카메라로 내 사진 하나만 찍어 줄래?'
( 나 ) '지금? 니 사진을?'
(청년) '응'
( 나 ) '내 카메라로?'
(청년) '응'
서툰 영어로 수줍게 물어보는 그의 요청을 나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도대체가 무슨 꿍꿍이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것도 자기 카메라도 아닌 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달래는지 그 속내는 알 길이 만무했으나, 사진 한 장 찍어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어딘지 모르게 측은하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마음이 동해 쉬이 6년 묵은 나의 고물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이왕 찍어주는 거 잘 찍어 줘야 하니까, 나는 어정쩡한 포즈로 셔터를 몇 번이나 누르고 포즈 요청도 해가면서 열성적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렇게 몇 분을 고군분투를 한 후, 결과물을 그에게 보여주었는데 그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아니 무슨 마음에 든다 어쩐다 말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사진이 목적이 아니었는 듯하다. 그는 뜬금 없이 호구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급 부담스러워졌지만(내향형임) 예의는 차려야 했기에 시답지 않은 스몰토크를 꾸역꾸역 이어나갔고, 그 결과로 의도치 않게 그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해변에서 서핑 장비를 대여해 주고 서핑 강습을 해주는 현지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발리에서 나고 자랐긴 했지만 친모는 브라질 사람이라고 했다. 어딘지 모르게 여타 현지인들과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나 보다. 그는 친모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브라질 땅에 발 디뎌 본 적도 없다고.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데 연락처도 뭐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마음속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랐다.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 걸까. 난 그런 거 잘 못하는데. 아니면 괜찮다고 북돋아 줘야 할까. 아니다. 내가 그의 상황에 대해서 뭘 안다고, 힘내라 어쩌라 하는 것은 선을 넘는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는데, 그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수줍게 쓸어 올리며 나의 다음 행선지를 물었다. 나는 무거운 주제를 탈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다음 날 우붓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이실직고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나중에 세미냑에서 같이 자기랑 서핑을 하자며 권유인지 회유인지 모를 말을 했다. 안 된다고 숙소 예약까지 다 마쳤다고 하니 나중에 다시 돌아 오란다. 핵당황. 내향인에게 이런 제안은 너무나 고역인데. 나는 당황해하며 거절 의사를 대충 표시하고선 집에 가봐야 한다며 짐을 부랴부랴 싸서 썬베드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왜 가는 거야?'라는 그의 물음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가면서 나는 30대에 하는 여행과 20대에 하는 여행이 참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20대 때는 지금보다 마음이 더 열려 있었고, 더 무모했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지금 보다 경계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일이 적었고, 그래서 그런지 친구를 만드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행을 하다가 낯선 사람이 같이 놀자고 제안해 오면 상대방이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 이상 시간을 같이 보내기도 했고, 이런 방식으로 실제로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30대가 되고 나서 여행을 해보니 내가 참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상대방의 순수한 의도도 열 번, 스무 번 다시 생각하게 되고 의심하게 된다. 물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이제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돼버려 무엇이든 경계하게 되는 이 버릇이, 때로는 새로운 가능성과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것 같아 슬프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세미냑 비치 출구를 찾고 있는데, 저 멀리서 또 한 사람이 나를 불렀다.
'걸어 오는 모습이 멋져서 그런데 사진 한 장 찍어 줘도 될까?'
오늘 무슨 날인가, 이 발리 여행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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