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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컴 Apr 09. 2021

#3. 나가는 문은 가볍고 들어가는 문은 무겁네

데이터사이언티스트가 될 줄 알았는데 못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


그때 나의 마음은 정말 가볍기 그지없었다. 나는 빅데이터를 공부할 거고, 더 이상 이렇게 업무 강도가 높은 조직에서 내 옷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내가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을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한 멋진 사람'인 척하고 다녔던 게 아닐까, 지금도 이불을 세게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다. 아무래도 뭇사람들은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장및빛 미래를 그리며 현실의 굴레에 굴하지 않고 내 갈 길을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쿨하고 멋진지를 생각하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올 수 없는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관둘 때는 깃털같이 나갔는데 들어가려니 물이 너무 많이 묻었나
들어가는 문이 너무 무거워서 도통 열리지가 않는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건 내 손에 달렸다.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고, 내가 하기에 따라서 모든 게 정해지는 진짜배기 게임의 시작이었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나의 첫 퇴사는 '멋지게 나오기 위해' 벌어진 일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나에게는 작은 복수 쇼 같은 것이었다. 대중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늘 나에게 적은 관심을 주는 법인데, 관계없이 내 자신에게 제법 요란했던 서프라이즈 퇴사 의식은 기실 나를 위해서라도 필요했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보상은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 크게 잘못한 사람은 없던.. 것 같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본분을 다했을 것이며 대체로 내가 부족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맞지 않는 옷을 예쁘게 입어보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퇴사 쇼는 어림없었지만 퇴사 자체는 정말 잘 한 일이었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될 줄 알았던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몰랐었지만,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되지 못할 것 같아서 되지 않기로 합리화 중인 오늘날의 내가 봤을 때, 그래도 데이터 분석하는 지금의 내가 훨씬 나에게 맵시 있는 옷을 주워 입고 있는 것 같다.


(사진 출처 : Pixabay)


다행히 지금 회사에서 2년 이상 근속할 수 있어서 웃으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이긴 한데, 결과적으론 잘 된 일이지만 하마터면 커리어 요단 강 건널 뻔했다. 35세 백수, 40세 백수의 가시밭길이 눈앞에까지 펼쳐졌었다. 천만다행히 드라마틱 하게 나를 위한 헬리콥터가 내려와주긴 했는데, 가벼울 것 같았던 문이 왜 이렇게 무겁던지. 


쉽게 봤다. 이도 저도 아닌 기간에 취업을 해야 했다. 개인적인 당위도 있었다. 좀 더 준비했으면 신입으로라도 준비된 상태로 입사할 수 있었을까. 나이는 한 살 더 먹었을 것이다. 20대 후반이라도 됐었더라면 신입으로 처음부터 아주 다시 시작해도 괜찮은데, 당시 나이 32세, 스포츠마케팅 2년여 경력과는 전혀 무관한 데이터 분석가 신입으로 입사를 준비하려니 나 같아도 나를 외면할 것 같다는 느낌이 암흑물질처럼 내 피부를 들쑤시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 기분에서 자유롭기가 너무 어려웠고, 자신감도 하락하는 찰나의 기간을 되돌아보면 지금도 아물지 않은 상처 부위를 또 긁히는 기분이다. 



퇴사는 정말 자유다. 다만 치열한 계획과 기획이 수반되어도 외생변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취업시장에서의 성패는 모른다. 나이까지 적지 않아 조급했다. 사실 연애를 시작해서 더 조급했다. 1년 이상 '백수 남친'딱지를 붙여주고 싶지 않았고 현실적인 금전 문제도 서서히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대학원을 가지 말고 남들처럼 정말 빡세게 공부해서 결과를 봤어야 했나? 생각도 꽤 많이 했다. 다만 대학원을 포기했다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의 구할 구푼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라, 그 가정은 상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자니 선택지가 더 좁아지고, 그러니까 마음은 더 급해지더라. 32살에 데이터 공부하겠다고 혈혈단신 퇴사한 후 1년이 넘은 어정쩡한 지원자를 받아줄 회사가 얼마나 많을까? 난 왜 그런 결정을 했던 걸까? 


한 달 정도, 정말 어려운 감정들이 지배할 뻔했던 기로에 서있었던 위태로운 내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한 끗 차이로 꼭 어긋나거나 접합된다. 내 능력 밖의 사건들로 말이다. 그걸 인연이라 부르고, 행운이라 여기며, 감사로 살아간다. 문을 열 수 있게, 잘 맞는 열쇠를 찾은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4화 예고 : 행운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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