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고마움
산 높고 산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절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길래 지금도 쓸쓸함을 주는 걸까?
충주와 제천의 경계에는, 문경과 체천의 경계에는 잉카 사람들이 남긴 돌덩이 예술같은 불상과 탑들이 남아있다. 이름하여 미륵대원이라는 곳이다. 예전에는 이곳을 미륵리사지라고 불렀다. 아마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와 구별하기 위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이 절의 이름 때문인지 몰라도 이 절이 있는 마을은 미륵리다. 그러다가 절 옆에 고려시대 여행객을 위한 숙박시설인 원터가 발굴되면서 미륵대원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옛날 신라 사람들은 소백산맥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살았다. 그러다가 신라가 힘이 세지면서 중원지역으로 진출을 꿈꾸게 되고 자연스럽게 소백산맥은 장애물이 되었다. 신라 사람들은 소백산맥을 넘기 위해 고갯길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첫 번째로 개척한 길이 계립령이다. 계립령은 지금 하늘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하늘 끝과 맞닿은 고개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경주를 출발하여 문경을 지나 충주로 진출하는 고갯길이 하늘재이다. 하늘재를 넘으면 남한강 뱃길을 이용해 서울까지 갈 수 있다.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위해 절이 만들어지고 원이 만들어졌다. 무사히 건너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무사히 건너온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절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마음이 지명에도 남아 문경 쪽에는 관음리가, 충주 쪽에는 미륵리가 되었다. 계립령이 개척된 후 얼마 뒤에 신라는 다시 죽령을 개척했다. 죽령은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을 연결하는 고갯길이고, 이곳 역시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용부원리사지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절을 만들었다는 것은 미륵리 사지 가 이곳에 있는 한 가지 이유일 뿐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건에게 신라를 넘길 때 반대한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일까 이 절에 있는 불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향을 하고 있고 불상이 바라보는 곳에는 덕주사 마애불이 있다. 덕주사 마애불은 마의태자 동생 덕주공주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남매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또 다른 이유는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있다. 신라말 도선에 의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풍수지리설은 고려가 건국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우리에게는 조상의 무덤을 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주흘산과 포암산, 신선봉, 월악산을 잇는 가운데 이 절이 위치하고 있다.
미륵대원지는 5차례 발굴을 통해 그 전모가 밝혀졌다. 미륵대원지에 있는 절은 수많은 보물들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에 세 개밖에 없다는 연꽃무늬를 한 당간지주가 있고, 당간지주 사이에 끼운 돌은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과 그 모습을 같이 한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귀부가 있다. 비석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현재 남아있지 않고 귀부에 흔적만 남겨놓았다. 예술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지만 귀부 어깨에 새겨진 아기 거북을 본다면 그 귀여움에 웃음이 절로 난다.
귀부 뒤로 육중한 5층석탑이 있고 그 옆과 뒤로 석등이 존재한다. 석등이 2개가 있는데 그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옆에 있는 석등은 불 놓는 자리를 방처럼 되어 있지 않고 기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석등은 고려시대 개경 근처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양식이라 의미가 있다.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불꼬처럼 생긴 문양이 눈길을 끈다. 석탑 뒤쪽 석등은 여느 석등과 그 모습이 같다.
석등 뒤로 석불 입상이 있다. 6개의 돌을 이용한 불상은 크기가 10m를 넘을 정도로 거대하다. 고려초기 거대한 석불을 만들던 유행이 이곳에도 존재한 것이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다는 예술적으로는 못하지만 친근감은 더하다. 석굴암이 돌로 만든 인공석굴이라면 이곳은 돌과 나무를 함께 한 석굴 사원이다. 나무는 불타 없어지고 불상을 둘러싼 돌방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 불상이 미륵인지 약사여래인지는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미륵불로 보고 있다. 이름, 미륵불 전설이 그러하거니와 미륵은 우리나라에서 용신과 결합하여 발전하였기에 미륵불 용을 만나기 위해 물이 필요했다. 익산 미륵사지와 경주 감은사지가 그러하다. 이곳에는 계곡물이 흘러 자연스럽게 용이 살 수 있으며, 불상 뒤쪽으로는 우물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미륵불로 보는 게 맞다고 한다.
오랫동안 복원하느라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다가 이제 개방되었는데 옛 느낌은 사라지고 없다. 유난히 하얀 얼굴이었는데, 복원하면서 다른 부분을 너무 열심히 닦았는지 불상 전체가 하얗다.
절 입구로 돌아 나와 왼쪽 편으로 원터가 있고 그 위로 3층 석탑이 하나 더 있다. 이것은 산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기(산천비보) 위한 탑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현대미술처럼 보이는 불상이 하나 있다. 전혀 고려시대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고려시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얼굴 부분만 있어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부처님 목주름(삼도)을 너무 심하게 만들어 놓아 부자연스럽다. 무슨 불상 목을 근육질 또는 링처럼 보여 개운하지 않다.
3층 석탑과 부처님 머리만 있는 이곳 왼쪽 옆으로는 문경으로 가는 계립령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여행 오고 걷는 도중에 만나는 김연아 나무를 보고 신기해한다. 과연 여행객들은 이 고개를 넘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옛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넘어야 할 정도로 위험했던 이 길을, 단순히 건강과 관광의 의미로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쉽기만 하다. 길의 의미를 알고 걷는 것과 모르고 걷는 것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곳에는 원터도 절터에도 어울리지 않는 특이한 전설과 관련된 유물이 하나 있다. 바로 고구려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이 바위처럼 있다.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충북 북부지역에는 온달과 관련된 이야기가 꽤 있다. 대표적으로 단양군 영춘에 가면 온달산성이 있다. 온달이 마지막 전쟁을 떠나기 전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고, 결국 온달은 그 전쟁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곳이 정확하게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온달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이곳이 고구려 사람들의 꿈과 좌절이 서려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