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순 감옥에서 만난 단재 신채호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거나 일제의 지배하에 살아갈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혼자서 때로는 가족들을 이끌고 언젠가는 돌아갈 것을 약속하며 건넜지만 많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그들의 꿈은 흩어졌다. 힘겨웠던 그들의 삶속으로 나는 편안하게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왔다. 마음이 편하지 않은 길이였고, 당연히 최소한 그러한 마음은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여름과 다롄의 여름은 별로 다르지 않았고, 도시의 사람들, 차, 가로수, 건물만 본다면 이곳이 중국이라는 것을 쉽게 인식하기는 힘들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중국에 왔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우리와 중국은 닮은 점이 많았다. 뤼순감옥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지루했고, 뤼순감옥을 본다는 설레임은 무더운 날씨속에 무뎌만갔다. 그러나 뤼순감옥을 답사하기 위해 가는 길이 나에게는 지루함으로 다가오지만 일제에 의해 끌려가는 독립운동가들은 무서움과 두려운 마음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미안함이 앞섰다.
힘들게 도착한 뤼순감옥의 첫인상은 높게 올린 붉은 담장이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을 천당과 지옥의 차이만큼 느꼈을 것 같다. 검시실에서 나체의 몸으로 작은 막대기를 넘는 과정에서 느꼈을 인간으로서 받아야할 최소한의 인격적 보장을 받지 못하는 수치스러움과 한편으로 다양한 이유로 가해져오는 매질은 또다른 고통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더 충격적 사실은 사형이나 고문을 당해 죽은 사람보다 이곳 검시실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 놀라웠다. 러시아가 만들고 사용했던 흔적은 검은 벽돌로 남았고, 이곳을 일본이 사용했던 흔적은 빨간 벽돌로 남았다. 뤼순감옥를 둘러보는 내내 많고 다양한 시설물은 그때의 이곳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공포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특히 나에게 가장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사형을 시킨 후 사람의 시체를 나무통에 넣어 묻었던 것을 그대로 전시해놓은 유물이었다. 상상 그 이상의 일들이 뤼순감옥에서 벌어졌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안중근, 신채호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 갇혀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인간의 본능과 이성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고통속에서 이성적 판단으로 끝까지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뤼순감옥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안중근이었다. 중국인들에게도 안중근의 활동은 많은 감동을 주었던 모양이다. 안중근이 생활했던 감방앞에 별도의 설명을 해놓았고 안중근이 사형당한 곳에는 의자를 두고 영정사진을 의자에 앉혀 있었다.
아무튼 단재는 이곳 어딘가에 수감되었다가 순국하셨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일제를 꾸짖고 자신을 채찍질하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만큼 단재는 올곧은 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