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포

by 경경 GyongGyong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분명 내 것인 것 같은데 뜻대로 다룰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내 인생? 인생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누구나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 앞에 놓인 시간과 장소와 사람과 일을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는 매우 유한적인 자유만이 우리에게 존재한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간혹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애초 관계는 우리의 것이 아닌데, 마치 자기 것이라 오해하여 애꿎게 우리는 종종 실망한다.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로 의존하나 온전히 독립적이다. 관계는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어떤가? 가장 다루기 어려운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신임을 우리는 일상의 평범한 체험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작심삼일은 채 의도하지 못한 주관적 의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 무엇 무엇은 언어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니 완전한 거짓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말과 글도 이러한 부류에 속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 것인 듯한데 내 것이 아닌,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절대 쉽사리 뜻대로는 되지 않는다.

이러한 말과 글의 성격이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평범한 글쓰기에 커다란 장벽이 된다.


흔히들 말하는, 말하듯이 글을 써보라는 이야기는, 말도 채 안 되는 이들에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림의 떡이다. 머릿속을 해파리처럼 떠다니는 상념의 조각들을 말이나 글로 표현해야 하는데 이 이름 모를 해파리들을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지극히 평범한 이들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평범한 자의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말이나 글은 어느 누구의 머릿속으로도, 마음속으로도 스며들지 못하고 증발되어 버린다.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이 글을 구성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다 체험적으로 안다. 거장이 그린 미술 작품을 보고 누구나 감상하고 감탄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거장과 같이 감동적인 작품을 그릴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냥 써본 글은 유아들이 자유로이 그린 추상화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의 온기가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른 이의 손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누군가와 악수를 한다는 행위는 어찌 보면 고도의 사회적 행동이다. 자신의 선의와 따뜻한 온기를 악수라는 행위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사실, 여러 가지 것들이 선행된다. 선의와 공감에 대한 인식,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행위의 의미에 대한 인식, 다른 이에게 선의를 전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사회적 상식에 대한 지식 등. 좀 과장된 듯싶으나 이 작은 행위 하나에도 사실은 여러 과정들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말이나 글을 통해서 무언가 표현하거나 그 표현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악수에 필요한 정도의 작법은 필요하지 않겠냐는 짐작이 매우 든다.


머릿속의 상념과, 감정은, 꼬리표를 붙이면 조금은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조각들이 된다. 이 조각들은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조사, 주어, 술어 등의 기능을 갖는 낱말의 형태로 말(구어)이나 글(문어)로 나타나야 비로소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말이나 글로서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위 두 과정은 거쳐야 한다.


머릿속의 조각들을 낱말의 형태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조각들의 정체와 낱말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조각과 낱말들을 연관 지어 표현할 수 있다. 낱말의 정체를 파악한다는, 낱말의 뜻과 그것의 말과 글 속에서의 기능을 이해한다와 같은 의미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 산 제품의 기능을 알기 위해 우리가 제품설명서를 읽듯이 낱말의 설명서를 읽어야 한다. 낱말의 설명서는? 국어사전이다. 국어사전은 낱말의 뜻과 말과 글 속에서의 그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종이책과 전자책이 병존하고 있어 사전도 종이책 사전과 전자사전이 있지만, 우리? 의 공통 기억 속의 첫 사전은 초등학교 졸업이나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는 종이책 형태의 영어사전일 것이다. 국어사전보다는 영어사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글쓰기의 어려움에 영어사전과 국어사전의 우선순위가 한 원인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선물로 쥐어진 영어사전은 호기심에라도 한 번씩은 펼쳐보거나(검색해 보거나) 하였다. 한편 영어사전에 밀린 국어사전은 참으로 긴 시간(어쩜 우리의 평생 동안) 잊힌 존재가 됨을 우리는 경험한다. 국어사전을 읽어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국어사전을 들춰보거나 검색해 본 적은 언제던가?


생각의 조각들을 담아내야 할 낱말의 정체를 모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낱말의 사용법을 숙지하고 있지 않으니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곤란스러워하는 것 역시 필연이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니 두려움을 느끼는 것 역시 숙명이다.


내 글쓰기의 두려움은 내 말과 글의 한계를 의미했으며 내 말과 글의 한계는 내가 아는 낱말의 한계를 의미한 것이었다. 내가 아는 낱말의 한계는 내가 국어사전을 펼쳐본 횟수의 한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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