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이 있으면 주의해서 생각하거나 본다. 이는 보살핌의 전제가 된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보살피려면 먼저는 그 대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고 보아야 한다. 반면 무관심은 이와 반대다. 주의해서 생각하거나 안 본다. 무관심으로는 어떤 대상을 보살피지 못한다. 관심은 좋고 무관심은 나쁘다. 정말 그런가?
너무 가까운 거리는 파괴적임을 우리는 경험하고 체험한다. 부모의 아이에 대한 지나친 간섭, 연인 사이의 지나친 의존과 집착, 삶의 하나의 목표였던 것이 삶의 모두를 삼켜버리는 우상이 되어버리는 등의 것들이다. 너무 먼 거리는 어떠한가? 절대 고독은 죽음임을 본능적으로 우리는 안다. 죽음을 반길 이는 아무도 없다. 적절한 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아내와 장모님의 관계는 어색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이방인이었던 내 눈에는 무척 낯설어 보였다. 어떻게 엄마와 딸의 관계가 이리도 어정쩡하고 어찌 보면 차갑기까지도 할 수 있는지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아내에게는 엄마한테 더 살갑게 하라며 조언을 가장하며 압박하였다.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모님에게는 이런저런 익숙한 시도들을 하였다. 손을 어루만지거나 어깨를 주물러 드리거나, 다정다감하게 수다를 떠들어 보거나 하는 등이었다. 멀어져 보이는 거리를 좁혀 보려는 순진한 의도의 시도였다. 거의 언제나 그 시도 끝에는 어색한 분위기만 서글프게 홀로 남았다. 아내와 나와 장모님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원해지지도 않았다.
장모님은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아내가 태어나 자란 집에서 홀로 생활하였다. 아내에게 묻곤 하였다. 연세도 있으신데 걱정되지 않냐고. 고독사라도 하시면 어쩌냐고. 아내는, 일 년에 세 번 정도, 연말연시 연휴(넨마츠넨시 야스미), 5월 연휴(고르덴 위-크), 8월 연휴(오봉 야스미)에 가면 된다고 하였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도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도 그렇게 일 년에 세 번 장모님 댁에 갔다. 장모님 댁에 머무는 일주일의 시간은 언제나 잔잔하였다.
장모님은 삼 년 전 연말에 혼자 사는 집 본인 방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쓰러진 지 반 일 정도가 흐른 뒤였다. 연말연시 연휴에 쉬러 오는 딸네를 맞이하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에 분주하던 중이었다. 장모님은 뒤늦게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한 달 정도 뒤에 다시 재활병원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지금은 공공특별돌봄시설의 신세를 지고 있다. 아내는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간다. 매일 나같이 엄마 일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거르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간다. 잔잔하게.
우리가 맺고 있는 여러 관계를 형상화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회색의 실선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실선은 대양과 같이 언제나 잔잔하다. 그런데 난 그 실선이 굵어지거나 짧아지는 것이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실선은 눈에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통제할 수도 없다. 언제나 대양과 같이 잔잔할 뿐이다. 아내와 장모님의 사이가 언제나 그저 잔잔한 것 같이. 그런데 그 잔잔함이 도리어 관계를 이어가게 하고, 그 가운데에 각자가 스스로의 삶을 잔잔하게 이어갈 수 있게 한다. 회색의 실선은 이미 대양이다. 너무 굵거나 짧지 않아도 잔잔히 우리를 이어준다. 가장 적정한 거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