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오역이 눈에 띄게 늘어 마음이 편치 않다.
큰애와의 말다툼은, 대부분 사소한 일이다. 그런데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듯싶기도 하다. 아이는 아빠에게 키메츠케루(단정 짓다)라고 항변한다. 그저 자신의 의견을 조금 더 간절히 전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어느 사이인가 아이에게는 그저 꼰대로 비치고 있었다.
번역을 하다 보면 번역이 술술 안될 때가 있다. 뜻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단어가 있을 때나 원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때, 혹은 적합한 모국어 단어를 찾지 못하거나 문장을 구성하지 못할 때이다. 또 하나의 경우가 원어 문장의 의미가 애매할 때이다. 이렇게도 해석이 되고 저렇게도 해석이 되는 경우이다. 꾸미는 단어와 꾸밈을 받는 단어의 관계가 애매할 때가 대부분이다. 보통은 원작자에게 확인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이렇게 확인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때 사용하는 방법이 오역은 되지 않도록 하면서 이런 의미와 저런 의미 모두를 아우르는 넓은 의미를 갖는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문장이 뜻하는 바의 포용력을 넓힌다.
큰애는 말한다. 다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를 단정한다고. 솔직히 맞는 이야기이다. 심사숙고하여 큰아이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아이에게 반응한 적이 대부분이다. 아이의 일상의 문맥을 완전히 파악하지도 않은 채 꼰대처럼 단정 지었다. 아이의 원어의 의미를 곱씹치 않은 채 스스로의 경험치로 단정하고 번역해 버렸다. 이 번역이 틀렸을 거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틀린 번역문이야 다시 고치면 된다. 그런데 꼰대같이 잘못 번역한 큰애의 의도와 그로 인해 생긴 불편한 감정은 그리 간단히 수정되지 않는다.
애매한 의미의 원어 문장이라도 가능한 한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 의미가 정확히 대응하도록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지만 이것이 어려울 때엔 역시 가능한 한 오역을 피하며 포용의 범위가 넓은 의미를 갖는 문장으로 번역하는 방법이 현실적으로 효과적이다. 적어도 다른 의미로 해석될 위험성을 낮추기 때문이다. 상대의 의도를 적절히 파악하지 않은 채 섣불리 자신의 경험치 안에서 단정해 버리는 일은 오역의 가능성을 높인다. 의미가 애매할 때에는 의미의 범위를 확장하여 해석하는 편이 오역의 위험성을 낮춘다.
큰아이의 원어의 의미를 적절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애써야 할 듯싶다. 어디 아이하고의 소통뿐이겠나. 쉽게 해석되지 않는 우리 주위의 원어가 도리어 더 일상적임을 우리는 거의 매일 경험한다. 이렇게 원어의 의미가 애매할 때에는 단정적인 번역은 피하며 범위가 넓은 포용적 의미로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며 효과적이다. 경험적으로 매우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