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오기 전에도 잠시지만 애니메이션에 빠진 적이 있다. 그때는 히라가나도 가타카나도 전혀 읽지 못했다. 그런데도 애니메이션의 화려함에 빠져들곤 하였다. 극장판 공각기동대 (고~카쿠키도~타이) GHOST IN THE SHELL의 여자 주인공(쿠사나기 모토코)의 목소리에 빠져들기도 했고 에반게리온을 보며 화면 속의 세계를 어딘가 동경하기도 하였다. 그때는 그림으로만 보였던 에반게리온의 타이틀 문자(エヴァンゲリオン)가 정말 멋져 보이기도 하였다.
처음 접하는 이국적 분위기?에 꽤나 매력을 느꼈던 듯싶다. 반면에 여러 적나라한 표현과 극단적인 표현(폭력적인?)은, 그만큼 불쾌하게 느끼기도 하였다. 뭘 저렇게 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나, 와 이건 좀 눈 뜨고 보기에 너무 끔찍하네 등등이었다. 그런데 도쿄에서 생활한 지 꽤 지난 지금은 그렇게 눈을 찡그렸던 그 극단적인 표현과 장면이 그다지 거슬리지 않게 되었다. 왜일까?
일본어를 학습하기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지렁이 같이 생긴 히라가나도, 무슨 기호같이 생긴 가타카나도 익히고 어느 정도 일상에서 말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장벽이 턱 하니 언어 정복?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바로 사람의 목소리이다. 정확히는 원어민의 여러 목소리이다. 어려운 내용의 뉴스도 알아듣게 되었는데 중년 아저씨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 평범한 아주머니가 하는 말도 잘 안 들린다. 그런데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의 대사는 또 잘 들린다. 전차를 기다리는 역 플랫폼에서 재잘거리는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모를 여학생들의 수다도 또 잘 들린다. 그런데 어제 잠깐 들른 편의점(콘비니)의 젊은 점원의 그 짧은 문장은 왜 또 안 들렸던 것일까? 잘 들리는 목소리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존재함을 체험한다.
어렴풋이 외국어가 의미 있는 소리로 들려오기 시작할 때엔 말하는 사람보다는 그저 말을 좇기에 바빠질 수밖에 없다. 말하는 이의 음색과 톤 같은 목소리의 특색은 사실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같은 말이라도 모어 화자의 목소리 특징에 따라 실제 음성은 천차만별이다. 모어 화자의 목소리 특징에 따라 아는 말이라도 잘 들릴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있음을 경험한다. 이 문제의 해결은 양을 쌓는 것 외엔 별도리가 없다. 어딘가의 기억과 무의식 속에 수많은 모어 화자의 음성이 어느 정도 차곡차곡 쌓이면 언제서부터인가는 각 목소리의 특색들을 자연스레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게 되고 그때에서야 제각각 다른 모어 화자의 목소리가 구분되어 들리게 된다. 외국어 모어 화자에서 이제는 외국어 모어 화자인 누구누구로 인식된다.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그제야 시작된다. 의도한 의미들이 전해지고 또한 작고 큰 감정이 전해지고 나누어진다. 온통 흑백이었던 세상에서 4K 해상도의 세상으로 바뀐다.
아내와는 세상이 온통 흑백이었던 시기에 만났다. 채 세상이 고해상도, 초고해상도로 바뀌기 전에 연애하고 결혼을 하였다. 백 미터 앞에서 서로를 보고 있었으니 작은 소음은 서로에게 들리지 않았다. 서로가 산 삶의 길이의 절반 정도를 같이 하고 있는 지금은 온통 주위가 4K 해상도인 초고해상도 세계가 되었다, 서로에게. 뿌엿하게 보였던 것들이 눈앞에서 매우 선명히 보인다. 뿐만 아니다. 작은 소음과 흠집 또한 거의 모두 빠짐없이 서로에게 잡힌다.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이제부터다.
그저 귓가에, 눈가에, 인식의 가장자리에만 닿았던 것들이 귓속으로, 눈속으로, 인식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다. 쉽게 듣고 넘기던 것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실은 그 불편함이 현실이었다. 쉽게 듣고 넘겼던 것들은 피상이다. 다행히 아내와 나는 불편한 현실 속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의 저편에 미처 들리고 보이지 않았던 서로의 실재를 아는 기쁨을 선택했다.
애니메이션을 도쿄에 살면서는 생각했던 것만큼 못 보고 안 보았다. 누구나 다 알 정도의 것들을 이따금씩 확인하는 정도다. 이야기의 가벼운 소재로서 이용하기 위한 요량으로. 루피로 유명한 원피스(완피~스), 건담(간다무)의 TV시리즈물, 진격의 거인(신게키노쿄진), 극장판 주술회전(쥬쥬츠카이센), 그리고 최근에 한국에서도 인기인 귀멸의 칼날(키메츠노야이바) 등의 것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역시나 표현들이 참 휘황찬란하고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최근, 한 오육 년 전서부터는 차마 눈 동그랗게 뜨고 보기 어려운,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피가 사방으로 튀기는 등의 장면들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표현의 뒤편에서 흐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피가 튀기고 목숨을 건 전투 장면의 밑에서 도도히 흐르는 동료애, 어느 길이 바른 지 처절히 고민하는 인간의 본 모습, 거대한 역사의 허상을 뒤집는 인간의 사랑, 출렁이는 파도 밑으로 잔잔히 흐르는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 그 어떤 악도 한 인간의 인간됨을 소멸할 수 없다는 소망의 이야기를 본다. 가을이 짙어질 때면 왼팔을 함께 들어올릴 동료(나카마)가 이따금씩 그리워지기도 하였다.
주말에 간혹 책이라도 펼쳐 볼 심산으로 집 근처 프랜차이즈 커피숍(대개가 도토~루)에 카페라테라도 시켜 앉아 있으면 백색소음이었던 것들이 언제 서부터인가는 감정이 스며든 목소리들로 들려온다. 이따금씩은 애써 읽으려 가져온 책 보다 가만히 들려오는 목소리의 이야기들이 더 흥미롭고 재미있을 때도 있다. 사람 사는 곳은 거의 어디나가 비슷하겠다는 확신이 경험적으로 든다. 이방인으로서 타국의 뉴스를 보며 슬퍼지기도 하고 웃음 짓기도 할 수 있게 된 시작이다.
아내는 결혼 전에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지금은 주로 여보(한국어로)라고 부른다. 나의 듣기 해상도가 높아진 건지 아내의 한국어 말하기 해상도가 높아진 건지 알 순 없으나 나는 아내의 여보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더 세밀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를 부르는 아내의 여보는 앉아만 있지 말고 타는 쓰레기(모에루 고미)라도 좀 버리고 오라는 소리이다.
저해상도의 세계에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4K 세계에서는 성가시게도 선명히 들려온다. 어쩌겠나, 난 고해상도 여보에 응답하고 살아가기를 다짐해야 한다. 그것이 삶임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