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그때
'만약에 우리'라는 영화를 봤다.
젊은 시절 사랑했던 남녀가 헤어지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 만나, 과거를 회상하며 '만약에 우리'를 생각하는 이야기다. 영화에서의 젊음은 아름답지만, 또한 잔인하다.
만약에...
난 만약이라는 단어를 별로 쓰지도, 마음에 떠올리지도 않는다. 타고난 것인지 훈련이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 일을 거의 복기하지 않는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거고, 결국은 돌고 돌아 나에게 좋은 일로 다가온다고 믿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금융가에서 일하다가 어떻게 요리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냐는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적잖게 당황했다. 왜 그랬지? 그냥 내 삶이 그렇게 흘러갔던 것 같은데. 정확히 내가 어떤 과정으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정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의 인터뷰를 거치면서, 옆구리를 쿡 찌르면 바로 나오는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부터 시작된 나의 커리어에 대한 고민과 내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요리를 발견하게 된 스토리'가 모범답안처럼 준비되긴 했다.
큰 맥락은 그렇다. 나의 꿈을 찾았고, 돈이 줄 수 없는 삶의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
이렇게 써놓으니 엄청난 순간의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종교적이기까지 한 삶을 산 것 같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시작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시작이었다. 내가 ‘요리’라는 낯선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일 수 있도록, 용기라고 부르기엔 조금 쑥스럽지만, 어쨌든 그것을 내 맘에 던져준 그 사소한 시작.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 Astor Wine이라는 큰 와인샵 2층에는 멋진 주방이 있다. 목요일 저녁이면 그곳에선 원데이 쿠킹클래스가 열린다. 딱히 취미랄 것이 없는 난, 퇴근 후에 요리나 배워볼까 싶어서 French Cooking 101이라는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했다.
와인샵에서 하는 쿠킹클래스라 와인 클래스도 겸한, 구성이 꽤나 좋은 수업이었다. 대여섯 명 정도로 기억되는 수강생이 선생님의 시연을 보고 각자 요리를 한 후, 동그랗게 앉아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어울리는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평일 저녁 시간을 알차게 때우기 딱 좋은 쿠킹클래스였다. (내가 서울에 돌아와 목금토 식탁을 열 때, 많이 참고가 된 쿠킹클래스다.)
팬에 닭고기를 굽고, 그 팬에 간단한 팬소스를 만드는, 지금 나에겐... 아주 간단하지만, 당시의 나에겐 너무 흥미진진했던 요리수업이었다.
닭을 손질하기 전, 닭고기 옆에 장식 겸 사이드로 올릴 채소를 손질했다. 선생님이 토마토로 장미를 만드는 것을 보여주셨고, 수강생들도 토마토 장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토마토 장미는 별개 아니었다. 사과껍질을 깎아본 사람이라면 쉽게 만들 수 있었다. 토마토를 손에 잡고 돌려가며 얇게 깎은 후 동그랗게 돌돌 말아주면 끝이었다. 이런식의 칼질에 익숙하지 않은 다른 분들은 토마토를 너무 꽉 잡아서 토마토가 터져버리기도 하고, 뭉툭뭉툭 토마토를 잘라 도저히 돌돌 말 수 없는 상태로 칼질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만들어 봤어요? 처음인데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어요?"
선생님의 칭찬에 난 '뭘 이런 걸로? 한국에 있는 내 친구들도 다 이 정도는 할 텐데?' 라고 생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후, 생닭을 가슴살, 허벅지살, 다릿살, 날개로 분리하는 시간. 선생님이 보여주신 대로 차분하게 닭을 슥슥 잘랐다. 어릴 적부터 요리를 좋아하던 나는 생닭을 만지는 것도 칼을 들고 과감하게 닭의 관절을 찾아 절단내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날 수업엔 생닭을 처음 만져본 분도 있었고, 닭의 관절을 유난히 못 찾는 분도 계셨고... 그 사이에서 나는 가장 먼저 닭을 분할하고 요리를 시작했다.
"너무 잘하는데요? 요리학교 다니고 있는 거 진짜 아니죠?"라는 선생님의 두 번째 칭찬.
띠딩~ 그날 난 왠지 모를 요리부심이 생겨버렸다.
나 남들보다 요리를 잘하나 봐.
수업시간에 배운 요리를 주말에 남편에게 똑같이 해주고 싶었다. 이 요리를 하려면, 수업시간에 썼던 무거운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이 필요했다 - 초심자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장비빨 아니던가? 남편과 집 근처 쇼핑몰에 가서 거금을 들여 All-Clad 팬을 샀다. 그리고 장을 보러 가서 평소에는 살 일이 없던 익숙하지 않은 재료를 샀다. 집에 돌아와 팬을 닦고, 요리재료를 준비했다.
팬을 달구고 칙칙~ 소리가 나게 닭고기를 굽고, 팬소스를 만들기 위해 뜨거운 팬에 와인을 부으니 쉬~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와인이 증발하면서 주방이 순간 뿌옇게 변했다. 난 고소한 닭고기 향기와 향긋한 와인향기에 벌써 신이 났다. 오븐에 아스파라거스와 양파를 구워 그릇에 닭고기와 함께 담았다. 요리사처럼 멋지게 숟가락으로 팬에서 소스를 떠서 닭 위에 샤~악 뿌려줬다.
예쁘게 그릇에 담긴 나의 첫 프렌치 요리를 먹는 남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던 나.
"야... 이젠 레스토랑 안 가도 되겠네!"라는 남편의 극찬을 듣고야 말았다.
난 이제 확신에 차버렸다.
나 진! 짜! 요리 잘하나 봐.
만약에 그때,
요리선생님께 칭찬을 듣지 않았더라면,
남편에게 칭찬을 듣지 않았더라면,
Astor Wine 2층에서 프랑스 요리에 이어 스페인 요리, 이탈리아 요리 수업을 듣지 않았겠지.
책방에 갈 때마다 요리책을 사모아 읽던 그날들이 없었겠지.
Food Network* 를 항상 틀어놓는 일도 없었겠지. (*미국의 요리 방송국)
머릿속이 온통 요리로 꽉 차는 일도 없었겠지.
그리고, 요리사가 되는 일도. 없었겠지.
2인분 / 30분
재료
닭다리살 4개
샬롯 한 개, 작은 다이스로 잘른 것
화이트 와인 3~4 Tbsp
버터 1 Tbsp
파슬리 조금
식용유 조금
소금/후추
(옵션) 사이드로 먹을 구울 수 있는 채소
조리법
팬을 뜨겁게 달굽니다. 코팅이 안되어있는, 스테인리스 팬에 고기를 구울 때는 팬을 잘 달구는 것이 중요해요. 뜨겁게 달궈진 팬을 불을 끄고 조금 식혀주세요. 여기에 식용유를 키친타월로 얇게 발라주세요. 팬을 다시 불에 올린 후, 팬이 다시 충분히 달궈지면 닭고기를 올리세요. 닭고기는 껍질 쪽이 먼저 팬에 닿도록 하고, 팬에 올리기 전에 소금으로 간을 해야 합니다.
억지로 고기를 팬에서 떼어내려고 하면 고기가 다 찢어져요. 고기는 다 익으면 알아서 팬에서 떨어집니다. 고기가 타지 않도록 불조절을 잘해주고 고기를 뒤집으세요. 뒤집기 전에 살 쪽에도 소금 간을 해주세요.
닭고기 양면이 모두 노릇노릇하게 익으면 팬에서 꺼내 따듯하게 보관을 하고, 그 팬에 그대로 식용유를 조금 두르고 (닭기름이 충분히 팬에 남아있다면 따로 식용유를 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샬롯을 볶아주세요. 샬롯은 금방 타기 때문에 약한 불에서 살짝 볶아주세요. 닭고기를 구웠던 팬을 그대로 쓰는 것이 바로 프랑스식 '팬소스'의 핵심입니다. 고기 굽고 남은 자리에 살짝 달라붙어 있는 노릿한 고기의 흔적을 프랑스어로 suc이라 하는데요, 이게 팬소스의 맛을 좌우해요. 그래서 고기를 구울 때, 타지 않고 노릇한 혹은 옅은 갈색을 띄는 suc이 잘 남아있게 굽는 것이 중요합니다.
샬롯이 투명하게 볶아지면, 여기에 화이트 와인을 부어주세요. 불이 세면 와인이 순식간에 증발할 수 있기 때문에, 팬의 불을 끄고 와인을 부은 후, 팬이 조금 식으면 다시 불에 올려도 좋아요. 나무 주걱으로 팬에 붙은 suc를 모두 긁어서 화이트 와인과 함께 섞어주며 화이트 와인을 졸입니다.
팬 바닥이 거의 보이도록 화이트 와인이 졸아들면, 팬의 불을 끄고 버터를 넣어 잔열로 버터를 녹여가며 화이트 와인 졸여진 것과 잘 섞어주세요. 이렇게 버터를 넣어 소스를 만드는 과정을 뵈르 몽테 (beurre monté) 라고 합니다. 버터가 분리되지 않고 졸인 와인과 잘 섞이면, 소금/후추로 간을 맞춥니다. 마지막으로 소스에 파슬리 잘게 다진 것을 조금 넣어주세요. (한 꼬집 정도만)
뵈르 몽테 (Beurre Monté)
그대로 해석하면 '버터 산'. 그 이름에 걸맞게 버터를 산처럼 많이 쓰는 프랑스 소스를 만드는 테크닉입니다. 작게 자른 차가운 버터를 뜨거운 스톡이나 와인, 또는 그냥 물에 넣고 잘 섞어 유화시키는 과정으로, 살짝 걸쭉하면서 부드러운 유화된 소스 (emulsified sauce) 를 만들어 줍니다.
그릇에 노릇하게 구워진 닭고기와 구운 채소 등을 올리고, 닭고기 위에 팬소스를 숟가락을 떠서 잘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