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단어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2009년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이었다.
뉴욕 맨해튼 42번가와 6번 에버뉴가 맞닿은 모퉁이의 고층 유리빌딩으로 출근한다. 건물 앞 커피 가판에서 따듯한 커피를 한 잔 산다. 삭막하게 느껴지리만큼 차가운 맨해튼의 겨울 공기에 얼어붙은 손,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꼭 쥐어 녹여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누군가가 누른 12층 버튼을 확인한다. 넓은 트레이딩 플로어의 안쪽에 있는 내 자리에 앉는다. 커피를 홀짝이며 내가 책임지고 있는 데스크의 어제 거래 내역을 들여다본다.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는 날이었다. 자동으로 여러 가지 계산을 해주는 시스템에 몇 가지 변수를 넣어 어제 거래 리포트를 만들어 오전 보고를 마친다.
보고를 마치고 나니, 나에겐 두 가지가 생겼다. 다 식어버린 쓴맛이 극대화된 커피와 잠깐의 시간적 여유. 커피를 마셔야 정신이 들 것 같은 생각에, 한약 마시는 마음으로 쓴 커피를 들이켜며 블룸버그 터미널의 실시간 뉴스 제목들을 읽어 내려갔다.
(사진 출처: https://www.bloomberg.com)
블룸버그 터미널에는 설정해 놓은 증권, 채권, 환율, 이자율 등에 관한 뉴스가 실시간으로 계속 올라온다. 급물살이 흘러가듯 화면 위로 쭉쭉 사라지고 있는 뉴스 사이로 눈에 띈 제목.
블룸버그 터미널의 뉴스였다. 그리고 연초였다. 당연히 올해 주식 포트폴리오 구성에 대한 뉴스다. 이 뉴스를 클릭하는 그 0.1초의 시간, 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그렇지 않아도 따듯한 치킨 누들 수프를 만들어 먹을까 했는데, 퇴근길에 마트에서 치킨스톡 (chicken stock)을 어떤 것을 사면 좋을까? 블룸버그에 이런 기사도 올라오네?'
뉴스를 클릭하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허탈할 틈도 없이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던 것 같다. 딱 마음을 먹은 순간. 이젠 인정하자. 나에게 stock은 더 이상 주식이 아니라 육수다. 금융계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곳에 애정과 관심이 초미세먼지만큼도 남아있지 않다. 난 요리사가 될 거다.
Les fonds sont à la cuisine ce que les fondations sont pour la maison.
- Auguste Escoffier
요리에서 스톡은, 집의 기초와 같다.
-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Auguste Escoffier, 1846~1935): 프랑스 요리를 집대성하고 그 기틀을 잡은, 요리사들의 왕, 왕들의 요리사로 알려진 프랑스 셰프.
'프랑스 주방'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스톡의 향기다. 제대로 된 프랑스 요리를 하고 싶다면, 일단 스톡을 만들어야 한다. 잘 만든 스톡이 있어야 맛있는 소스를 만들 수 있다. 프랑스 요리의 핵심인 소스가 없다면,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완성할 수 없다. 스톡은 프랑스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스톡, 육수, stock, fond
Stock (프랑스어로는 fond)을 우리말로 육수라고 하지만, 제대로 옮기자면 '뼈 국물'입니다. 고기만 넣고 끓인 국물은 broth (프랑스어로는 bouillon)라고 하고, 뼈를 오랜 시간 끓여낸 국물을 stock (fond)이라 부릅니다. 우리말 육수는 이 두 가지 개념을 모두 포함하는 것 같아, 이 글에선 stock을 '육수'가 아닌 '스톡'이라 옮겨 썼습니다.
스톡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영어/프랑스어로는 white stock/fond blanc과 brown stock/fond brun이라 하는데, 맑은 스톡과 진한 스톡 정도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맑은 스톡은 뼈를 비롯한 모든 재료들을 바로 물에 넣어 끓이는 반면, 진한 스톡은 보다 농축된 색과 맛을 내기 위해 뼈와 채소를 오븐에 구운 후 물에 끓인다. 맑은 스톡을 만들 때는 주로 닭뼈를 사용하고. 조리시간도 비교적 짧아 2시간 정도면 만들 수 있다. 진한 스톡에는 주로 소뼈나 송아지뼈를 사용하고 조리시간은 15시간이 넘어간다.
요즘처럼 쉽게 시판 스톡을 사용할 수 있는 시대에, 굳이 오랜 시간을 써가며 스톡을 끓일 필요가 있을까? 라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꼭 스톡을 직접 만들고 그 스톡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어보라고 대답하겠다. 요리의 재료를 돋보이게 하지만 스톡 자신의 맛은 드러내지 않는다. 직접 끓인 스톡의 은은하지만 깊은 맛은 시판 스톡의 조금은 자극적인 맛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마침, 스톡이 떨어진 오늘, 오래전 나를 미소 짓게 해 줬던 'good stock'을 만들 생각이다. 스톡이 끓는 동안 잠시 눈을 감고 동료 요리사들과 치열하게 일하던, 그 향기가 머물던 프랑스 주방도 떠올려 봐야겠다. 그리고 오랜만에 치킨 누들 수프도 만들어야지.
1 리터 / 2시간 30분
재료
닭 뼈 150g (닭 다리 뼈 5개) *
찬물 1.5 리터
양파 30g, 껍질 벗기고 한입 크기로 썬 것
당근 20g, 껍질 벗기고 한입 크기로 썬 것
셀러리 15g, 한입 크기로 썬 것
대파의 흰 부분 15g, 한입 크기로 썬 것
마늘 한 쪽, 껍질째 살짝 뭉개준 것
생(生) 타임(thyme) 몇 줄기
월계수 잎 한 장
검은 통후추 15알 **
* 닭 뼈는 어느 부위를 사용해도 좋지만, 가능하면 콜라겐이 많은 닭 다리, 넓적다리 쪽 뼈를 사용하면 좋습니다.
** 정통 프랑스식 치킨스톡을 만든다면, 오늘 만드는 스톡의 양을 생각하면 후추알을 5알 정도가 적당합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후추알을 많이 넣었습니다.
닭 뼈를 흐르는 찬물에서 씻어서 묻어 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해 주세요. (저는 닭 북채 다섯 개를 사 와서 살을 발라내고 뼈로 스톡을 만들었습니다. 닭 다리 살은 따로 익혀 치킨 수프를 만들 생각입니다.) 잘 닦아낸 닭 뼈를 냄비에 넣고 찬물 1.5 리터를 넣고 강한 불에서 끓이기 시작합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중간 불로 낮추고 15분간 끓이면서 떠오른 불순물을 계속해서 걷어냅니다. 불순물을 제거해 주지 않으면 스톡의 색이나 맛이 탁해져요.
당근, 양파, 파, 마늘, 타임, 월계수 잎, 통후추를 모두 넣고, 두 시간 동안 중간 불보다 조금 약한 불에서 보글보글 끓여줍니다. 두 시간 내내 15~20분에 한 번씩 떠오르는 기름기와 불순물을 걷어내세요. 스톡이 만들어지는 동안 뼈는 완전히 물에 덮여 있어야 하는데, 혹시 물이 너무 빨리 증발해서 닭 뼈가 물 위로 올라오면, 물을 조금 더 넣어가며 끓입니다.
스톡은 양념하거나 간을 더하지 않기 때문에, 불 조절만 잘 신경 쓰면 됩니다. 스톡을 부글부글 강한 불에서 끓이면 재료들이 끓는 물 속에서 부서지면서 스톡이 탁해지기 때문에, 불을 잘 조절해 가며 '보글보글' 끓이는 것이 중요해요.
두 시간 후, 뽀얀 국물의 치킨스톡이 완성이 되면, 불을 끄고 한 10분 정도 그대로 둡니다. 끓는 물에서 마구 움직이던 작은 건더기들이 냄비 바닥에 가라앉도록요. 뼈나 큰 건더기들은 미리 건져내고 나머지를 고운 체에 밭쳐 스톡을 걸러냅니다. 고운 체가 없다면, 체에 면포를 깔고 스톡을 걸러냅니다.
걸러낸 스톡이 담긴 용기를 즉시 얼음물에 담가 스톡을 최대한 빨리 식혀주세요. 바로 스톡을 사용하지 않으면, 조금씩 녹여서 쓸 수 있도록 소분하여 얼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