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은 늘 옳은가

치유는 진실 그 자체에서 오지 않는다

by 민진성 mola mola

작은 정의의 승리

청소노동자들에게 기초상식시험을 보고, 그것을 인사고과에 반영을 하여 해고의 근거로 삼기까지 하는 것은 정당한가. 드라마 <노무사 노무진> 5~6화에서 다룬 내용이다. 그리고 이것은 2021년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로 근무하던 이모 씨가 영어, 한자 필기시험 등을 강요받았고 시험과 과도한 업무 부담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내용이다.

2021년 6월,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 이씨(59)씨가 과도한 육체노동 및 스트레스가 주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실제로 고용노동부는 이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했고, 서울대학교 인권센터도 이를 인권챔해로 해석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해당 사망을 산업재해로 인정을 했고 유가족은 2024년 배상소송에서 약 8,600만원 배상을 판결받았다. 드라마에서 다룬 내용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고, 이것은 실제로 법적으로 문제 상황이라고 해석되었다.



정의는 계몽으로부터 오는가

다시 드라마로 돌아와보자. 그 드라마에서는 노무사의 어머님이 청소노동자로 일을 하고 계셨고, 관련 사정을 듣고 노무사의 팀이 개입하는 내용이었다. 내규를 통한 인사고과 평가로 볼 여지도 있었기에 마땅한 대응방안을 찾지 못하던 노무사는 시험 반대 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청소노동자분들을 한 데 모아 식사들 대접하면서 시험 반대 운동에 참여해줄 것을 요구한다. 정작 그러자 여러 반박이 나온다.

"이만한 직장이 없다.", "나는 치매예방도 되는 것 같아 좋다.", "최고 명문 대학교에서 일하는데 그 정도 공부하는 게 뭐 어떻느냐.", "직고용해주는 곳이 어디있느냐." 등의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그 중에는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도 나온다. "이 일을 해서 자식들 등록금도 다 냈어."라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뿌듯함과 자부심을 갖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노무사는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에 답답해한다. 그들은 본연의 직무와 무관한 시험을 통해 인사평가를 받고 해고를 당하기까지 하는 처지의 사람들이었고, 식비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해 학생식당에서 식권을 사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그들이 노동법과 인권에 대해 무지한 것 같아 답답하다. 그러자 노무사의 어머님이 일어나 발언을 시작한다. "일하는 동안 학생들이 인사 한 번 건낸 적이 있느냐.", "아무리 청소 일을 한다고 해도 인간다운 대우는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 감정호소에 동조한 이들은 시험 반대 운동에 나선다. 시위현장에서는, 현재상황에서 만족과 자부심을 드러내던 사람들은 온데간데 사라졌다. 그저 자신의 상황이 좌절스럽고 슬프고 원망스럽고 한탄스러운 사람들 뿐이었다. 물론, 그런 실력행사를 통해 끝내는 문제를 해결해낸다.




계몽은 무조건 옳은가

많은 사회개혁은 소수의 불편함에서부터 시작했고 그것이 전체에게 혜택이 되었음을 깨닫는 구조로 이루어져왔다. 프랑스 대혁명 역시 그렇다.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가 전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권'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듯 말이다. 정보 접근권, 표현력, 이해력에서 불균형이 있는 구조에서는 다수는 불합리를 운명이나 성실로 착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과연 무조건적인 계몽이 그들의 삶을 행복으로 이끈다 보장할 수 있는 걸까. 그 드라마에서 노무사와 그 어머님은 그들의 관점을 전체에게 강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결과 오히려 반대로 자율적인 선택을 하던, 또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던 다수의 평온한 삶을 흔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험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지만, 다수의 삶에는 오히려 긍정적 동기가 되었을 지도 모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노무사와 그 어머님의 계몽 행위는 그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그렇지 않게 만들었는가. 계몽되지 않고 행복한 삶, 계몽되었지만 불행한 삶. 둘 중 어느 곳이 더 바람직한 삶인가.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가 결정할 권한이 있는가. 그 노무사와 어머님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들의 인생의 구조를 바꾸어 놓았는가. 스스로 문제제기를 한 이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이들을까지 불행하고 불공정한 구조에 갇혀 있는 이들도 내면화되게 만드는 것은 과연 옳은가. 왜,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자식들 등록금까지 냈다고 자부심을 드러내던 이들까지 불합리한 착취의 대상이었음을 내면화해야 하는가. 진실은 늘 옳은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늘 옳은가. 무언가를 아는 것은 해방인가 구속인가.


아는 것이 힘인가. 모르는 게 약인가.



CPTSD 진단을 받고 난 후

나는 원래 만성적인 우울과 무기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친한 사람들이 생기고 잘 지내도 마음 한 켠에 남은 공허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늘 개똥벌레라 칭하며 친구가 없다 이야기하고 다녔다. 늘 그렇게 살아서 이상한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 그냥 재미삼아 해본 테스트에서 시급히 상담이 필요한 우울증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병원이나 보건소를 몇 번 가봤는데 늘 검사를 진행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그냥 하루 가고 말아서 정확한 내 상태에 대해 알지 못했다. 강박으로 인한 치통과 두통이 심해져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후에야, 그리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에야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CPTSD 진단을 받았다. 나의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삶에 많은 왜곡이 있음을 깨달았고 내가 살아온 삶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난 스스로를 환자이자 피해자, 생존자로 내면화하였다. 그러자 나는 더 많은 증상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증상이 더 심해졌다. 대인기피성향도 더 심해졌고 약이 없으면 잠도 잘 수 없다. 산책 정도의 외부활동에도 뒷목과 어깨가 금방 굳어버리고 두통과 현기증을 달고 살아간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몸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린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 같은 해리증상이 생기고 그 증상으로 인한 심한 멀미가 느껴진다. 그냥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누워 있어도 멀미가 나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기도 하다.


가끔, 어쩌면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차라리 내가 나의 증상을 잘 몰랐다면 어땠을까. 그냥 만성적으로 우울하고 무기력한 사람으로 그냥 그렇게 살아갔더라면 어땠을까. 가끔 강박으로 인해 치아 한 두개쯤 깨먹었겠지만 그래도 그냥 그런대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스스로 몸을 다칠 때까지 긁거나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의 상태에 놓이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책임 없는 계몽

나의 이런 감정은 치료 초기에 흔히 나타나는 감정이라고 한다. 나의 상태를 정확히 알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이다. 치료가 지속되고 증상이 약화되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많이 변한다고 한다. 그런데, 글쎄. 정신질환은 딱히 의사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너무 적다. 약이나 상담은 보조적인 수단일 뿐 근본적으로는 환자가 자신의 환경을 재구조화하고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의 관성을 바꾸어야 한다. 즉, 의사는 나에게 진단이라는 계몽을 제공하지만 그 이후 계몽에 따른 충격은 내가 감당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의사선생님은 그저 "할 수 있잖아요.", "할 수 있는 거 아는데 왜 그래요.", "할 수 있죠"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할 수 없는 게 증상이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병원에 왔는데 할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은 마치, 기침을 너무 많이 해서 이비인후과를 찾았는데 의사가 "기침 안 할 수 있잖아요.", "기침 안 하면 돼죠."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책임 없는 계몽'이라 부르기로 했다. 실제로 초기 치료 상태의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계몽의 사후처리

나의 회복도, 사회문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전문성을 활용하거나 때때로는 그것에 도취되어 계몽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계몽을 이상적인 것 마냥 다룬다. 계몽시키는 이들을 선구자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계몽 이후 그들이 겪는 자아정체감의 혼란은 아무도 사후처리하지 않는다. 계몽에는 윤리적인 책임과 철학적 책임감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경계하는 계몽가는 없다.


치유는 진실 그 자체에서 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관계, 그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준비, 진실 이후에도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지지 구조가 있을 때만 비로소 진실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누군가를 계몽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그들의 삶이 파멸로 이어지지 않을지 점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생각번호20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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