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해석 너머, 개인화된 트라우마 이해를 위하여
트라우마를 정의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트라우마란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의 극심한 공포나 무력감을 유발하는 사건이다." 이 정의는 ‘사건’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이 정의는 보통 PTSD 진단 기준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이 설명이 늘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느낀다. 왜 어떤 사람은 그 ‘사건’을 겪고도 멀쩡히 일상으로 돌아오고, 다른 사람은 같은 사건 앞에서 인생 전체가 무너질까? 같은 사건이지만 반응은 다르다. 그렇다면 트라우마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내면 작동 방식에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관점에서 트라우마는 단지 공포나 위협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그보다 “세계에 대한 나의 해석 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을 때” 트라우마가 발생한다. 이 말은 곧, 트라우마는 정보처리와 인지구조의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은 안전하다”는 전제가 무너졌을 때, “나는 존중받을 만한 존재다”라는 믿음이 깨졌을 때, “이 일은 나에게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이 뒤집혔을 때. 이처럼 기존의 내면 서사(narrative identity)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혼란과 해리에 빠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트라우마의 본질이다.
물론 구조주의적 해석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젠더, 계층, 문화, 전쟁, 가정폭력 등 권력 구조에 따른 피해 양상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효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내가 경험한 트라우마는 언제나 매우 사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남성’이라서가 아니라, ‘나’이기에 무너졌고, ‘약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나만의 해석 체계’가 붕괴했기 때문에 무너졌다. 그런데 많은 심리학 이론서들은 개인 차이를 지우려 한다. “강간은 전쟁보다 더 큰 PTSD를 유발한다”는 식의 서술은 개인의 신체적·인지적 감각을 무시한 채 사건의 서열만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서술은 때때로, 나의 고통이 ‘덜 중요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나는 PTSD라는 진단 체계가 개인의 고통을 환원하는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진단명보다는 내 이야기가, 증상보다는 내 방식의 해석과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트라우마를, “나라는 존재가 겪은 세계의 붕괴”로 해석하고, 회복을, “다시 세계를 의미 있게 재조직하는 작업”으로 본다. 누군가는 글을 통해, 누군가는 걷기를 통해, 누군가는 기도나 명상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망가진 세계’를 다시 조립하고 있다.
이제는 트라우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억압받은 계층을 지칭하는 정치적 언어도, 단순히 진단적 분류만 반복하는 의학적 언어도 아닌, 고유한 인간의 복원력을 담아내는 언어. 나는 그 언어를 쓰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당신이 겪은 트라우마가 무엇이든, 그 고통은 단지 ‘사건’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세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걸, 그리고 그 무너짐조차도 하나의 성장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이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살아남은 그 모든 사적인 방식들이,
과학보다 더 정교한 회복의 언어가 되기를.
#2025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