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선생님의 말이 닿지 않은 이유
교통사고가 날 뻔했던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괜찮아요”라는 말을 뱉고, 허겁지겁 그 자리를 떠났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은 조여들고, 혼자 벽을 짚고서 숨을 고르며 말도 안 되는 괜찮음을 되뇌었다. 그 순간, 내 감정은 말이 없었다. 그건 ‘감정’이라기보단, 몸이 먼저 알아차린 어떤 반응이었다. 이건 나중에 알았다. 그게 바로 정동(affect)이라는 것이라는 걸.
흔히 감정이라 하면 “무섭다”, “화가 난다”, “서운하다” 같은 감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동은 그보다 더 빠르다. 말이 되기도 전, 해석되기도 전, 그저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심장이 쿵 내려앉고 목이 탁 막히고, 손발이 얼어붙는. 이 모든 반응은 아직 ‘감정’이 아니다. 그저 나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내 몸의 신호다. 그리고 나는, 이 정동을 잡아내는 데 오래 걸렸다.
의사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감정을 돌봐준 어른이 없어서 그래요.” 그 말은 따뜻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어딘가 깊은 갈증을 느꼈다.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그 말은 ‘과거의 결핍’에 원인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바랐던 건, 현재의 내 신체 반응과 그 맥락을 해석해줄 누군가였다. 나는 불완전했던 과거의 내력이 아니라, 지금의 내 반응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했다.
내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건, 용기 없는 내가 아니라 정동을 의식으로 끌어올릴 언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동은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로써만 그것을 다룰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원했다. “그때 느꼈던 몸의 반응은 정동입니다.”, “당신은 지금 정동과 감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정동을 인식하고 명명하는 것은 조절 능력을 기르는 첫 걸음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개념어들이 나를 납득시켜 주길 바랐다.
의사 선생님의 말은 공감의 언어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 구조의 언어가 필요했다. 정동 조절 능력이 약한 나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 이전’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내게 필요한 건 과거의 결핍을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반응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능력이었다.
우리는 상담자나 정신과 의사를 “공감자”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공감과 구조 사이를 잇는 다리여야 한다. 당신이 경험한 것은 ‘정동’입니다. 정동은 이렇게 몸에 나타납니다. 이를 감정으로 해석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훈련이 가능합니다. 이런 설명을 해줄 수 있을 때, 환자는 과거에 머무는 존재가 아닌, 현재를 바꾸는 주체가 된다.
나는 지금도 가끔, 아무 말 못 하고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게 정동이고, 내가 감정을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걸. 그리고 언젠가는, 나처럼 어버버거리던 누군가에게 정확한 언어로 이 반응의 정체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25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