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 중 환청과 정동 조절, PTSD의 감각 트리거에 대하여
샤워는 일상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공포’이기도 하다. 나는 샤워할 때마다 거실에서 무언가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소리를 듣는다. 처음엔 진짜 일어난 일인 줄 알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다. 텅 빈 거실과 조용한 공기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젠 안다. 그건 플래시백 기반의 환청이다. PTSD, 특히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CPTSD)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감각 트리거 증상이다.
샤워는 인간의 가장 무방비한 시간 중 하나다. 귀엔 물소리가 가득하고, 시야는 흐릿해지며, 몸엔 아무 보호 장비도 없다. 이처럼 감각이 부분적으로 차단되는 상황은 외상경험자에게 ‘과거의 위협 상황’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PTSD를 가진 뇌는 이를 위험 신호로 오판하며 경고음처럼 ‘기억 속 소리’를 울려 퍼뜨린다. 이것은 정신분열적 환청이 아니다. 실제로 과거에 들었던 소리가 재생되며, 뇌는 마치 지금 여기에서 다시 그 사건이 일어나는 것처럼 반응한다. "소리를 통한 플래시백", 바로 그것이다.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도,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이는 단지 놀란 것이 아니라, 이미 ‘전투-도피 반응(fight or flight)’이 발동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심장은 빨리 뛴다. 근육은 긴장하고, 호흡은 얕아진다. 뇌는 여전히 위협을 느낀다. 문을 열기 전, 나는 숨을 고르며 현실을 내게 납득시켜야만 한다. “괜찮아. 지금은 안전해.” 이 숨고르기가 ‘정동 조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동 조절’을 단순한 감정 조절로 착각한다. 하지만 정동은 감정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신체 기반 반응이다.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나는 것. 그것이 정동이다. PTSD 환자는 이 정동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침입하듯 작동한다. 그러니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실습이 매일 벌어진다. 샤워할 때조차.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 소리는 실제가 아니며, 내 반응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고, 그 생존은 지금, 조절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내가 지금 느끼는 공포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생존 반응이다.” 이 사실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조절도 가능해진다. 나는 일지를 쓴다. 소리가 들린 시각, 내용, 내 반응, 회복 시간. 그 기록은 내 뇌에 “더 이상 위협이 아니다”라는 재구성된 맥락을 전달한다. 그리고 때때로 나는 다음과 같이 나 자신에게 속삭인다. “지금 들리는 소리는 과거의 기억이야. 지금은 안전해.”, “나는 도망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어. 문을 열기 전에도, 숨을 고를 수 있어.”, “그건 내 약함이 아니라, 내 힘이야.”
이따금 나는 상상한다. 정동 조절이 가능한 사회, 샤워를 편히 할 수 있는 세계, 그리고 그곳에 사는 나. 모든 환청이 사라지는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 문을 열기 전, 숨을 고를 수 있으니까.
#2025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