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하다 마주친 감각 이상
샤워를 하다가 불현듯 소름이 돋았다. 온몸에 난 털들이 모두 곤두선 느낌이 들었다. 그러더니 이인감(비현실감)이 들기 시작했고, 해리증상이 찾아왔다. 분명히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너무 추웠다. 온몸이 서늘하고 추워서 몸이 떨렸다. 그래서 물을 더 뜨겁게 틀었다. 물을 제법 따뜻한 듯한데 몸이 추워서 뭔가 싶었다. 그러다 문득 갑자기 너무 따갑고 아팠다. 급하게 몸을 틀어서 물을 피해 나와보니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이 샤워기에서 세차게 나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마저 마치고 나왔다. 어깨 부분이 따갑고 잔뜩 빨갛게 부어 있었다. 다행히 차가운 물로 진정을 시키니 얼마의 시간 후에 괜찮아졌다. 서둘러 몸을 피하길 잘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샤워 중에는 물소리로 인해, 또 문이 닫혀 있기 때문에 외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욕실이라는 밀폐된 공간, 김서림, 안경을 끼고 있는 않는 상태로 인해 시야가 좁아진다. 피부는 물과 접촉하여 예민해지고 따뜻한 물로 인해 감각이 살아나기도 한다. 즉, 감각적으로 고립되거나 예민해지는 환경이 된다. 이런 상태는 CPTSD 환자에게 위험을 감지하기 어려운 상태로 인식될 수 있고, 이렇게 과각성된 뇌는 지금 경계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사실 자체에 불안을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샤워 중에 환청을 자주 듣는다. 특정하고 분명한 뜻이 담긴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밖에서 엄마의 비명이라거나 고함,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 무엇인가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혼자 있을 때건 혼자 있지 않을 때건 상관없다. 집에 엄마나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정말 무슨 소리가 나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저 물소리를 타고 그런 소리가 들린다. 정말 밖에 누군가 왔다거나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물을 끄고 소리에 집중을 해보거나 문 밖으로 나가본 일도 있었지만 정막만 감돌 뿐이었다. 환청이다. 아마 감각적으로 폐쇄되고 예민한 상태에서 PTSD 중 하나가 환청의 형태로 발현되는 듯하다. 이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어느새부터 그랬다. 언제는 무서웠다가 언제부터인지는 샤워할 때마다 그러리 그냥 그러는가보다 했다. 그래서 이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살았다.
물소리는 지속적이고 백색소음에 가까운 자극으로, 외부소음을 차단하면서도 뇌의 자동화된 감각 회로를 자극한다. 이 때 뇌는 과거의 감각 기억(청각, 감정)을 재생하는데, 이는 정확한 문장이나 단어가 아닌 느낌으로 나타나는 환청일 수 있다. 이건 실제 기억이라기보단 신경계가 당시의 위협 상태를 반복적으로 시뮬레이션하며 만들어내는 감각의 환기라고 볼 수 있다.
환청은 정신병적 증상이 아니라 감각성 외상 기억일 수 있다. 나의 환청은 망상성 정신질환(조현병 등)의 환청과는 다르다. 내용이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과거 트라우마와 명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의심하고 있는 스스로의 인식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외상성 환각(traumatic hallucination) 또는 감각기반 해리성 증상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징후가 아니라 과거 생존을 위해 진화한 방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외부 자극으로부터 독립된 공간, 내 방 문을 닫고 있는 상황 혹은 내가 어찌 대처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특정 트라우마가 발현되었던 기억들이 나로 하여금 같은 상황에서 미리 긴장하고 각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몸은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말초 혈관을 수축시켜 피부 온도를 낮춘다. 이로 인해 실제로 피부가 차가워질 수 있고, 뇌는 지금 춥다는 신호를 강하게 받게 된다. 긴장을 하거나 무서울 때 간담이 서늘한 것도 이의 일종일 수 있다. 또, 해리 상태에서는 감각 입력이 뇌에서 비정상적으로 처리된다. 뇌가 지금 몸에 닿는 온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예기치 않게 왜곡된 방식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 몸이 노곤노곤하고 편안해진다. 그래서 잠이 오기도 하고 감각을 조절하기에 편리하다. 그런데 샤워를 하던 와중에도 해리증상이 나타나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이 정도까지의 해리증상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다만 환각 증상은 꽤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던 증상이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오래되었다. 어쩌면 아주 어릴 적, 중학생 시절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던 것 같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무섭고 긴장을 했어야 했던 걸까. 샤워를 하는 동안에는 문 밖에서는 내가 알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벌어진다. 누군가의 비명소리, 무언가 부셔지는 소리, 쾅쾅 거리는 소리.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다. 나는 그 소리가 때로는 무서워서, 때로는 실증이 나서 일부러 물소리나 비누칠 소리를 크게 내며 그 소리를 지워버린다. 하지만 그 소리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문 밖에서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일들은 모두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일어날 뿐이다.
#생각번호202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