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알려주는 인생의 의미
이유는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 나는 비오는 날을 제법 좋아했다. 그저 복도 창가에 서서 창문 밖으로 비가 내리는 걸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도 좋았다.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는 소리가 제법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들도, 빗소리에 숨을 죽이듯이 잦아들었다. 빗소리에 둘러쌓인 나는 마치 어떤 나만의 공간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분주한 학교의 하루 속에서 비가 내려주는 고요는, 마치 세상이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잠시나마 나에게 쉼을 허락해준 것만 같았다. 빗소리가 마치 커튼처럼 나에게 안락함을 제공하고 사람들의 말소리, 발소리, 미래에 대한 불안한 생각 조차도 모두 밖으로 밀어냈다.
현실의 소음들은 날카롭고 무례하고, 자꾸만 나를 찌른다. 빗소리는 분명한 소음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의 생각조차 잠잠해지고 흔들리는 마음이 멈춘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말해주는 것만 같다. 어쩌면 그 소리의 본질적인 속성이 다르기 때문일 수 있다. 사람의 말소리는 나를 향해 자꾸만 끌어당기고 해석하려 드는데 빗소리는 그저 그냥 거기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소음이다. 비가 내리는 것은 그냥 내리는 것이다. 자연히 그냥 내리는 것이다.
그냥 나에게 있었던 일들도 빗소리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하루 2~3시간 자가면서 순공부시간 16~18시간 채워가며, 응급실도 3번이나 갈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했지만 정작 수능을 망쳤던 일도, 모든 걸 다 줄 것처럼 사랑했지만 정작 그 상대는 나의 조건을 재면서 그냥 버리고 떠나버린 일도, 책임과 성취에 대한 부담을 이겨내지 못해 치아를 갈고 무는 걸 택하는 바람에 모든 걸 포기하고 집에 내려와 갇힌 꼴이 되어버린 일도 그냥 다 빗소리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그냥 내리는 거지 아무 이유가 없다. 그냥 그런 거다.
그 모든 일들은 어쩌면 원인이 아니라 풍경이었는지도 모른다.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지나가는 비구름 같은 기억들. 우산으로 그 비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냥 잠깐 젖었다가 다시 마를 수도 있다. 폭풍우 같은 비를 쏟아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또 말간 얼굴로 돌아온다. 애써 붙잡지 않고 억지로 잊지도 않고, 그저 '비가 내리네'라고 바라보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치유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왜 비가 왔는지를 끊임없이 되묻겠지만 비를 맞아 홀딱 젖은 채 그것을 원망하며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냥 궁금해서 묻는 날이 오면 좋겠다.
비가 오기 전에, 비가 오는 동안에는 늘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흙 속에 사는 방선균(Actinobacteria)이라는 미생물이 만들어내는 지오스민(Geosmin)이라는 물질이 있다. 이 물질은 흙냄새의 주요 성분인데, 사람은 이 냄새를 매우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다. 비가 오기 직전에는 대기 중 습도가 급격히 상승한다. 이로 인해 지표면 가까이에 있는 지오스민 입자가 공기 중으로 확산되거나 흙 표면의 입자에 붙어서 공기 중에 퍼질 수 있다. 비가 오기전에는 기압이 낮아지고, 바람이 변화하면서 지오스민을 포함한 냄새 입자들이 사람의 코 가까이로 운반되기도 한다. 빗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어김없이 흙냄새를 앞장 세운다. 그 냄새는 기억이나 추억 따위의 강렬한 매개가 되어 흙냄새를 맡으면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비가 올 때쯤 자연히 피어오르는 흙냄새, 사람들이 쓰고 있는 우산들이 알록달록해서 귀엽다고 느꼈던 감정들, 추석 때 집에 안 가고 공부하겠다고 친구 집에 얹혀 살면서 학교 도서관 가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계곡 놀러온 줄 알았던 그런 기억,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한치 앞도 안 보이는데 체육시간이라고 어떻게든 축구 해보겠다고 뛰어다니던 그 시간들 같이 그냥 그렇게, 그냥 그런 일들 속에서 의미를 찾으면 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우산 같이 쓰고 집에 갈 친구 한 명이 필요할 뿐이다. 이왕이면 비 때문에 다치거나 일상이 무너지는 사람이 없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 것뿐이다. 이왕이면 나랑 우산을 같이 쓰고 가는 친구가 좀 사랑이 넘쳐서 내가 하는 일을 기뻐해줬으면 좋겠고 나보다 더 열성적이면 좋겠다. 그런 와중에도 천친함과 장난스러움으로 가끔 우산 접어두고 빗속으로 뛰어들어 보기도 하면 좋겠다. 예측가능한 일상 속 상냥한 불규칙을 경험하게 해주면 좋겠다.
#생각번호2025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