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잘못이 아닌 상처를 미래로 가져가지 않기 위해
아동학대나 트라우마는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경험은 내 몸에 흔적을 남기고, 감정 조절은 더 어렵고, 관계는 더 조심스럽고, 결국 나는 더 많이 준비해야만 한다. 때로는 억울하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내가 더 회복해야 하고, 왜 더 신중해야 하고, 왜 배우자를 고를 때까지 더 많은 기준을 세워야 하는 걸까.
하지만 생각해본다. 잘못(guilt)은 과거의 심판이고, 책임(responsibility)은 미래를 설계할 권리다. 내가 이 과정을 선택하는 건, 벌을 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 세대에서 이 흐름을 멈추겠다는 선언이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음 세대를 설계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일이다.
회복의 과정은 단순히 상처를 메우는 일이 아니다. 감정을 다루는 법, 스스로를 돌보는 법, 갈등을 대화로 풀어내는 법을 하나씩 배우는 일이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나는 어떤 사람과 함께할지를 고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위기에서 회피 대신 대화를 선택하는 사람, 나의 취약함을 존중하고 지켜줄 사람. 이런 기준은 나를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더 안전하고 단단하게 만든다.
불리함이라는 시작점은 슬프지만, 그 슬픔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과거의 연장이 아니다. 나는 나와 아이, 그리고 내 관계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시작점을 만들 수 있다. 내 잘못이 아닌 상처를 책임으로 바꿀 때, 나는 오히려 더 강한 설계자가 된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불리함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길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비슷한 불리함에서 출발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부디 기억했으면 좋겠다. 당신이 출발한 곳이 당신의 결승점은 아니다. 당신은 언제든 선을 새로 그을 수 있다. 당신이 설계한 그 선 위에서, 다음 세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기에 더 안전하고 더 따뜻할 것이다.
#생각번호2025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