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폭력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현실 속 폭력 경험은 언제나 복합적이고, 그래서 회복도 복잡하다

by 민진성 mola mola

교과서 속 단일 사건과 현실의 괴리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트라우마는 “하나의 사건”이다. 교통사고, 전쟁, 자연재해처럼 뚜렷한 시작과 끝이 있는 경험 말이다. 이런 사건은 임상적으로 단일 사건 트라우마라 불린다. 하지만 현실의 폭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이를 때리는 부모는 동시에 언어적 모욕을 가한다. 학교폭력 피해자는 집에서 정서적 방임을 겪기도 한다. 성폭력 피해자는 사건 이후 사회적 비난과 불신이라는 2차 피해를 겪는다. 즉, 폭력은 거의 언제나 복합적이다.



다중폭력피해경험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자 David Finkelhor는 아동학대를 유형별로만 쪼개서 연구하는 방식을 비판했다. 그는 “실제 아동은 여러 형태의 폭력을 동시에, 반복적으로 경험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다중폭력피해경험(poly-victimization)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곧, 한 아이가 신체적 폭력·정서적 학대·방임·학교폭력 등 여러 맥락의 위험에 동시에 노출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런 환경은 단순히 “사건”이 아니라 아이에게 삶 전체가 위기라는 감각을 남긴다.



왜 단일 폭력 개념이 여전히 쓰일까

그렇다면 왜 연구와 임상에서 여전히 “단일 사건 PTSD”라는 말이 남아 있을까?


교통사고나 재난처럼 뚜렷한 사건 후 발생한 PTSD는 노출 치료나 EMDR 같은 기법으로 비교적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 “단일 사건 피해자만 연구에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즉, 학문적으로는 구분이 필요하지만, 현실에서 단일 사건만 겪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다중폭력의 심리적 결과

연구에 따르면 다중폭력 경험자는 단일 사건 피해자보다 정서 조절의 어려움, 대인관계 불신, 부정적 자기개념, 우울·불안·자살사고 위험에서 훨씬 더 높은 수치를 보인다. 이는 단순한 공포 반응이 아니라 삶 전체에 스며든 불안과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진단 체계에서도 PTSD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 C-PTSD(복합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독립적 범주로 제시된 것이다.



회복의 관점도 달라져야 한다

단일 사건 트라우마는 “그날의 기억”을 다루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다중폭력 피해자는 안전한 환경 확보, 신체 감각 회복, 관계 회복, 자기 서사의 재구성 등 여러 층위의 회복 단계를 거쳐야 한다. 치료도 선형적이지 않고, 되돌림과 반복을 전제로 한다.



복잡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현실의 폭력은 거의 언제나 다중적이다. 단일 사건이라는 말은 학문적 구분일 뿐, 실제 삶에서는 예외적 상황에 가깝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건 단순히 개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회복을 설계하는 방식, 피해자를 이해하는 시선, 사회적 지원 체계를 마련하는 데 모두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단일 폭력이 아니라, 다중폭력. 이 언어의 전환이 피해자들에게는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내 경험이 복잡했던 것”이라는 깊은 자기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




#생각번호202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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