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기억, 권력, 그리고 나의 선택권에 대하여
아빠가 말했다. “내가 죽으면 후회할 거야. 꼭 기억해. 내가 죽으면 어쩔 거냐.” 그 말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처음엔 별 감흥이 없었다. ‘솔직히, 아빠가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내가 너무 냉정한 건 아닐까? 가족이 죽으면 당연히 슬퍼야 하는 거 아닌가?' 심리학 연구를 보면, 부모의 감정적 압박이나 심리적 학대가 반복되면 아이의 자존감이 흔들리고, 불안과 죄책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고 한다. 2021년 한국 일반 성인 5,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아동기 심리적 학대 경험이 성인기의 우울, 불안, 자살 사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나는 그 말에 흔들린 내 마음을 보며, 이게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몸이 반응하는 심리적 패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 ‘어? 이거 협박 아니야?’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나는 입 밖으로 꺼냈다. “지금 협박하시는 거예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아빠는 비릿하게 웃었다. “맞아. 협박하는 거야.” 그 말이 나를 다시 차분하게 만들었다. 마치 머릿속이 맑아지고, 흐릿했던 장면이 초점이 맞춰진 것처럼 선명해졌다. 연구자들은 이런 순간을 “현실 검증(reality testing)”이라고 부른다. 한 연구에서는 부모의 학대·방임이 청소년의 학교생활 적응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자기존중감(self-esteem)이 높을수록 그 피해가 줄어든다고 보고한다. 내가 그 순간 ‘협박이라면 들어줄 생각 없어’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도, 바로 나 자신을 지켜내는 심리적 자원이 작동한 순간이었다.
만약 내가 규범에 순응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가족인데,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꺾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경계를 세웠다. 이수정 교수의 2022년 연구에서는 가스라이팅 가해자가 관계의 권력 불균형을 활용해 피해자를 조종하려는 심리를 분석하고, 피해자가 판단력을 회복하는 것이 관계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내가 협박임을 인식하고 선을 그은 것은 단순한 반발이 아니라, 그 심리적 지배에서 벗어나는 첫 단계였다.
가스라이팅은 노골적일 수도 있고, 아주 은근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흔들린 뒤에도 자기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협박을 협박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나의 감각을 다시 신뢰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너무 냉정한 건 아닐까’라는 질문 대신 ‘이 관계에서 내가 지켜야 할 경계는 무엇일까’를 묻는다.
혹시 당신도 누군가의 말에 잠시 흔들리고 있다면,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건 협박인가, 부탁인가, 대화인가?” 그 질문이 깨어남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자리는,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아빠가 말했다. “과거에서 벗어나야지. 행복하게 살아야지.”말만 놓고 보면 치료적으로 맞는 말이다. 실제로 트라우마 치료에서는 과거 기억의 고통스러운 재경험에서 벗어나 현재에 머무르는 능력을 회복의 중요한 지표로 본다. 하지만 그 말이 가해자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더 숨이 막혔다. 마치 그 말이 나를 미래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과거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2차 가해(secondary victimization) 라고 부른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잊어라", "행복해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면서 동시에 피해자의 감정을 부정하는 행위로 작동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이런 발화는 피해자의 회복 속도를 늦추고, 때로는 죄책감과 자기비난을 강화한다 (Campbell & Raja, 2005).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지금 본인만 참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차례대로 꺼냈다. 전교 1등 못하면 2등이라도 얻어맞았던 기억, 구구단과 한자 외우다 못 외우면 맞았던 기억, 상산고에 가기 싫다고 말할 수도 없었던 기억. 이런 기억들은 내 CPTSD의 뿌리다. 한국 일반 성인 5,102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조사에서도 아동기에 경험한 심리적 학대(psychological abuse) 가 성인기의 우울·불안·자살사고와 유의미하게 연결된다고 보고됐다 (Lee et al., 2021). 그러니 내 마음이 여전히 그 방에 묶여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빠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나? 난 기억이 안 나." 그 말은 내게 다시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트라우마 연구자 Judith Herman은 피해자가 경험한 폭력을 사회나 가해자가 인정하지 않을 때, 그 기억은 다시 고립되고 재외상화(retraumatization)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나의 증언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나는 다시 그 시절의 무력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끝까지 말을 마쳤다. 이것은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관계의 힘의 균형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한국의 한 연구(이윤아 외, 2019)는 부모의 학대·방임이 청소년의 학교생활 적응을 해친다는 결과를 제시하면서, 자기존중감(self-esteem)이 이 관계를 완충하는 중요한 보호 요인임을 보여준다. 내가 기억을 꺼내어 증언한 것은 자기존중감을 회복하기 위한 심리적 행위였고, 비록 그가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스스로를 검증하고 인정한 것이다.
아빠는 여전히 “행복해라”라고 말한다.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말에 맞추어 억지로 행복해지려 하지 않는다. 행복해지는 일은 내 선택이다. 내 기억을 인정하고, 내 상처를 말하고, 내가 준비되었을 때, 내가 나를 풀어줄 것이다. 행복해지라는 말보다 내 기억을 들어주는 사람이 더 큰 위로다.
아빠는 종종 말했다. “너한테는 형보다 0 하나 더 붙여서 지원해줬어. 상산고 학비며, 사교육비며 다 합치면 네가 훨씬 많이 받았어.” 그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상산고 학비는 분명 큰돈이었고, 형보다 더 많은 사교육비를 쓴 시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초등학생 때 집에 혼자 남겨져 무서웠던 밤, 학비 안 드는 영재교육원을 스스로 찾아가 버텼던 나, 형은 계속 사교육을 받았지만 나는 중학교 3년 이후 다시 혼자 공부했던 시간들. 그 차이를 설명하면 아빠는 늘 큰돈만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건 큰 결제 내역이지, 내 일상 속의 결핍은 기억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게 정말 ‘지원’이었나요, 아니면 ‘투자’였나요?” 지원은 아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투자는 아이가 잘하는 것에 더 걸고, 성과를 통해 보상을 얻으려는 심리가 섞인다. 나는 상산고에 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과학고 장학금을 받아 가는 게 내 꿈이었다. 하지만 아빠 말에 거역할 수 없어서 상산고에 갔고, 결국 그 선택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빠가 “너한테 더 해줬다”고 말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건 내가 잘해서 받게 된 장학금, 내가 만든 성과까지 합산된 숫자다. 투자의 결과를 부모의 공으로 돌리고, 심지어 나의 선택권을 지워버린 셈이다.
형은 공부를 못해 사립고에 갈 성적이 안 됐다고 했다. 그래서 사교육으로 밀어주고, 나는 혼자 공부하게 했다. 이것이 정말 나를 편애한 걸까? 돈을 많이 썼다는 사실이 곧 사랑과 관심의 증거일까? 연구에 따르면, 아동기 정서적 방임(emotional neglect)은 신체적 학대보다도 우울증, 불안, 자존감 저하에 더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Norman et al., 2012). 즉, 돈의 많고 적음보다 아이의 정서적 경험이 삶의 궤적에 더 큰 흔적을 남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돈을 쓴 게 아니라, 잘할 것 같으니까, 잘하니까 쓴 것이라면 그건 편애라기보다 성과 기반 차등대우에 가깝다.
이제 나는 부모의 말에 숫자로만 갚으려 하지 않는다.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돈이 아니라 내 의사에 귀 기울여주는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지원과 투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돈의 액수가 아니라, 내 삶을 누구의 의지로 살았는가에 달린 문제다. 더 많이 해줬다는 말보다 더 많이 들어줬다는 말이 아이에게는 진짜 지원이 된다.
아빠는 말한다. “너한테는 형보다 더 많이 해줬어. 상산고 학비며 사교육비며, 다 합치면 네가 훨씬 더 받았어.” 그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상산고 학비는 분명 큰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내 의사로 선택한 길도 아니었고, 나는 그 학교에서 나를 잃어버렸다.
1학년 때, 같은 중학교 출신 친구 하나가 가출하듯 자퇴했다. 나중에 그 친구 서랍장에 있던 성적표를 보니 내신이 8등급과 9등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친구는 중학교 졸업 당시 때 종합 등수는 전교 7등이었다. 그리고 나의 성적표도 다르지 않았다. 7등급 하나, 그리고 줄줄이 이어지는 8·9등급. 물론 그 친구도, 나도 전국평가시험의 전국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나도 자퇴하고 싶었다. 어쩔 땐 그냥 죽고 싶었다. 한국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지속적인 학업 실패와 낮은 성적은 자살 사고 위험을 3배 이상 높인다 (Park & Kim, 2019). 또한 높은 경쟁 압박에 놓인 특목고 학생일수록 우울증상, 불안, 무기력감이 일반고 학생보다 유의미하게 높다는 결과도 있다 (Lee et al., 2017). 그 3년 동안 나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과정은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값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모가 “우리가 너한테 더 많이 썼다”고 말할 때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마치 내 고통이 단순히 학비 영수증으로 대체되는 것 같다. 트라우마 연구자 Judith Herman은 피해자의 경험이 사회적으로 부정되거나 축소될 때 그 기억은 다시 고립되고 재외상화(retraumatization)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부모의 말은 나의 고통을 인정하는 대신 숫자로 환산해버린다. 그 말은 내 기억을 더 외롭게 만든다.
나는 여전히 묻는다. 그 돈은 정말 나를 위한 지원이었을까? 내가 원하지 않았던 선택에 쓰였던 비용은 투자였지 지원이 아니었다. 연구에서도 아동기 부모의 강압적 기대와 선택권 박탈이 청소년기 자율성 상실감, 우울감과 강하게 연결된다고 보고한다 (Soenens & Vansteenkiste, 2010). 즉, 돈의 많고 적음보다 중요한 것은 내 의사가 존중되었느냐 하는 문제다.
나는 이제 그 시절을 돈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그 3년이 내 자아를 얼마나 흔들었는지, 내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그것을 제대로 말할 뿐이다. 내가 바라는 건 감사 인사가 아니다. 그 시절의 나를 인정해주는 것, 내가 겪은 고통을 “힘들었겠다” 한마디로 들어주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유일한 지원이다. 돈은 쓸 수 있지만, 아이의 자아는 한 번 부서지면 다시 세우는 데 평생이 걸린다.
#생각번호2025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