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지는 나, 흔들리는 관계

도망치고 싶은 마음, 몸의 변화,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질문

by 민진성 mola mola

[#1] 탈출하고 싶은 마음도 회복의 일부다

도망치고 싶은 나를 비난하지 않기


탈출하고 싶은 순간

나는 요즘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빨리 이 집을 떠나고 싶다.” 그 마음은 때로 너무 강해서 당장 가방을 싸고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든다. 예전에는 이 마음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내가 너무 약한 걸까? 왜 도망치고 싶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건 회피가 아니라, 내 몸이 나를 지키기 위해 보내는 신호라는 것을.



몸이 먼저 아는 것

트라우마 연구자들은 말한다. 신체는 위험과 안전을 뇌보다 먼저 감지한다 (van der Kolk, 2014). 그래서 의식으로는 “괜찮다”라고 생각해도, 심장은 빨리 뛰고, 손발이 차가워지고, 머릿속은 이미 도망 경로를 계산하고 있다. 내 몸이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회복이 불가능해. 안전한 공간으로 가야 해.”



연구가 말해주는 것

연구에 따르면, PTSD 환자가 지속적으로 트리거 환경에 노출될 경우 증상이 심화되고 치료 효과가 떨어진다고 한다 (Briere & Scott, 2014). 그래서 치료 계획에는 종종 물리적·심리적 거리두기가 포함된다. 즉, 탈출하고 싶은 마음은 치료를 망치는 게 아니라 치료를 지키는 전략이다.



나를 비난하지 않기

나는 이제 이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방을 싸서 나가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나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속으로 반복한다. 그러면 몸의 긴장이 조금 풀리고, 내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든다.



독자에게

혹시 당신도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있는가? 그 마음이 약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라. 그것은 몸이 보내는 경고이고, 당신이 여전히 살아 있고 스스로를 지키려 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마음을 죄책감으로 덮지 말자. 그 마음은 당신이 회복하고 있다는 신호다.




[#2] 근육이 아니라 나를 만든 시간

운동을 비난받는 기분과 사랑에 대한 의문


비난으로 시작된 질문

아빠는 어느 날 물었다. “몸이 왜 이렇게 커졌냐, 왜 그런 걸 하냐.” 그 말은 내 몸을 위한 노력을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운동은 나를 위한 선택이었는데, 그 선택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더 이상한 감각이 찾아왔다. “사랑한다면 내가 몸을 돌보는 걸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화를 내지?” 나는 단순히 비난받은 게 아니라 “나를 진짜 사랑하는 게 맞나?”라는 근본적인 의문까지 들었다.



아빠가 싫어하는 진짜 이유

심리학에서는 통제 상실(control loss)이 가족 갈등의 큰 촉발 요인이라고 말한다 (Smetana, 2011). 내가 몸을 키운다는 건 더 강해지고, 더 독립적이 되고, 더 이상 아빠의 통제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아빠는 그 변화를 불편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거 왜 하냐”라는 말로 다시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한다.



운동은 나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단순한 근육 만들기가 아니었다. 나는 덤벨을 드는 매 순간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 몸이 약해진 게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을 조금씩 되찾아왔다.



몸과 뇌가 다시 연결되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규칙적인 운동은 해마(hippocampus)의 신경가소성을 높이고 BDNF(뇌유래신경영양인자)를 증가시켜 우울증과 불안을 완화한다 (Schuch et al., 2016). 또한 운동은 편도체(amygdala)의 과도한 반응을 낮추고 스트레스 호르몬을 조절해 몸이 다시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즉, 내가 운동을 했던 시간은 트라우마로 끊어진 몸-뇌 연결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비난이 남긴 상처

심리학에서 이런 경험은 자율성 침해(autonomy violation)로 불린다. 자기 결정권이 무시될 때 사람은 무력감과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또 하나의 메시지를 받았다. “아, 이 사람은 내가 강해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게 맞나?” 자율성 침해는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CPTSD 환자에게는 이런 의문이 과거의 강압적 관계 기억을 소환하고, 더 깊은 혼란을 만든다 (Ryan & Deci, 2000).



사랑이라면

사랑한다면, 내가 몸을 돌보고 강해지는 걸 응원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운동을 통해 나를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좋게 봐줘야 하지 않을까? 근육이 아니라 나를 만든 시간이었으니까.




[#3] 힘이 커지는 순간, 관계가 흔들릴 때

자율성과 신체 변화가 불러온 새로운 긴장


달라진 힘의 감각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아빠가 더 이상 나를 때리지 않는 건 내가 커서 맞기 어려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본인도 안다. 힘으로는 나를 제압할 수 없다는 걸. 그 대신 남은 건 말이다. 협박, 비꼼, 죄책감을 불러오는 말. “내가 죽으면 후회할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해줬는데.” 예전에는 피해야 할 것이 주먹이었다면, 이제는 피해야 할 것이 말이 되었다.



왜 내 몸이 불편할까

나는 한동안 근력운동을 열심히 했다. 근육은 빠졌지만, 골격은 잡혔다. 그런데 아빠는 그걸 불편해했다. “몸이 왜 이렇게 커졌어? 왜 그런 걸 하냐?” 처음엔 단순한 잔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은 내 몸의 변화보다 내 자율성을 겨냥하고 있었다. 운동은 내가 선택한 행동이고, 몸이 커지는 건 내가 강해지고 있다는 가시적 증거다. 그게 아빠에게는 위협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통제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가는 나를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 불편했을 것이다.



연구가 말해주는 것

심리학 연구들은 이런 상황을 설명해준다. 부모의 심리적 통제(psychological control) 는 자녀의 자율성 발달을 방해하고, 죄책감을 유발해 관계에 의존하게 만든다 (Soenens & Vansteenkiste, 2010). 아이가 성장하면서 신체적·심리적 힘이 커질수록 가해자는 폭력에서 언어적 통제로 방식을 바꾸며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Herman, 1992). 관계적 트라우마 연구에 따르면 보호자가 위협과 보호를 동시에 주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의 권력 균형에 극도로 민감해지고, 부모 또한 권력 상실에 불안을 느낀다 (Liotti, 2004). 즉, 내 몸이 커졌다는 건 단순한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가족 관계의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신호였다. 아빠의 불편함은 단순한 취향 문제가 아니라 기존 질서가 흔들린다는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연구의 공백과 나의 목소리

놀랍게도 이런 주제를 직접 다룬 연구는 거의 없다. “성인이 된 아동학대 피해자가 신체적으로 강해지고 자율성을 확보할 때 부모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이 질문은 학계에서 아직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것과 앞선 연구 조각들을 합치면 이 현상은 분명 존재한다. 부모는 자녀의 자율성을 위협으로 인식할 때 그 힘을 다시 약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방식의 통제를 시도한다. 내가 운동으로 몸을 키웠을 때 들은 말, 그 말이 나를 흔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배운 것

이 깨달음은 역설적이게도 나를 더 차분하게 만들었다. “아, 이제는 때릴 수 없다는 걸 본인도 인정한 거구나.” 그건 내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나는 더 강해졌고, 이제는 말로도 내 삶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독자에게

혹시 당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가? 당신이 강해지고, 독립하고, 변해갈 때 누군가 그 변화를 불편해하며 막으려 든 적이 있는가? 그건 당신이 잘못된 게 아니다. 그건 당신이 힘을 되찾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그만큼 당신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APA 스타일)


Herman, J. L. (1992). Trauma and recovery: The aftermath of violence—from domestic abuse to political terror. New York: Basic Books.

Liotti, G. (2004). Trauma, dissociation, and disorganized attachment: Three strands of a single braid. Psychotherapy: Theory, Research, Practice, Training, 41(4), 472–486.

https://doi.org/10.1037/0033-3204.41.4.472


Soenens, B., & Vansteenkiste, M. (2010). A theoretical upgrade of the concept of parental psychological control: Proposing new insights on the basis of self-determination theory. Developmental Review, 30(1), 74–99.

https://doi.org/10.1016/j.dr.2009.11.001


Kunz, J. (2013). Parental psychological control and autonomy granting: Distinctions and associations with child and adolescent adjustment. Child Development Perspectives, 7(3), 135–140.

https://doi.org/10.1111/cdep.12029


Greene, C. A., Haisley, L., Wallace, C., & Ford, J. D. (2020). Intergenerational effects of childhood maltreatment: A systematic review of the parenting practices of adult survivors of childhood abuse, neglect, and violence. Clinical Psychology Review, 80, 101891.

https://doi.org/10.1016/j.cpr.2020.10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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