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사회성의 강요에서 벗어나 진짜 어른으로 서는 과정
아빠는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늘 말씀하신다. “그때는 나도 어렸어. 그래서 그랬어. 너가 좀 이해해.” 하지만 나는 그때 아빠보다 훨씬 어렸다. 아빠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성인이었고, 나는 미성년자였다. 힘의 균형도, 권력도, 책임의 크기도 달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빠가 그때를 “어렸던 시절”이라고 말하면, 나는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그 말은 사실상 내가 맞은 이유가 ‘아빠가 어렸기 때문’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트라우마 연구자 Judith Herman(1992)은 가해자가 “그때는 나도 힘들었다”라고 말할 때,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은 위로가 아니라 책임 전가라고 설명한다. 이런 말은 가해자가 스스로의 책임을 줄이고, 피해자에게 “네가 이해해줘야 한다”는 추가적 부담을 준다. 이를 재외상화(retraumatization)라고 부른다. 연구에 따르면, 아동기에 체벌이나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성인이 된 뒤에도 우울·불안·대인관계 문제 위험이 평균 2배 높다(af Klinteberg et al., 2013). 즉, 그때의 폭력은 단순히 “지나간 일”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다. “어렸다”는 말로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발달심리학에서는 30~40대를 인지적·정서적 성숙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로 본다. Arnett(2000)은 이를 성인기(adulthood)라 명확히 정의하며, 이 시기의 성인은 이미 완전한 사회적 책임과 자기조절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아동·청소년은 여전히 충동 억제, 정서 조절, 위험 판단 능력이 미성숙하다. 즉, 40세 성인은 “어려서 몰랐다”는 말로 폭력을 정당화하기 어렵다. 10대 아동은 보호받아야 할 위치에 있고, 그때 맞은 상처는 보호자 책임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나도 어렸다”는 말은 책임 회피일 가능성이 높고, 피해자에게는 상처를 덮는 말로 들리기 쉽다.
그런데 지금의 나에게 아빠는 “애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내 감정을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연구에 따르면, 트라우마 피해자는 감정을 표현할 때 자주 “유치하다” “과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때 경험하는 무력감은 회복을 더디게 만든다(Ehlers & Clark, 2000). 즉, 과거의 폭력으로 멈춘 내 감정이 아직 회복 중일 때 “애 같다”는 말은 치유 과정을 더 어렵게 만드는 2차 상처가 된다.
연구들은 반복적으로 말한다. 과거의 폭력이나 학대에서 회복하려면 책임의 명확화가 필요하다.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인정해야 하고, 피해자는 그 책임을 다시 떠맡지 않아야 한다. “나도 어렸다”는 말은 책임을 줄이는 말이 아니라 “나의 잘못이었다. 미안하다.”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Herman, J. L. (1992). Trauma and Recovery. Basic Books.
af Klinteberg, B., et al. (2013). Physical child abuse triggers adult antisocial behavior and psychiatric problems. Child Abuse & Neglect, 37(9), 702–710.
Arnett, J. J. (2000). Emerging adulthood: A theory of development from the late teens through the twenties. American Psychologist, 55(5), 469–480.
Ehlers, A., & Clark, D. M. (2000). A cognitive model of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Behaviour Research and Therapy, 38(4), 319–345.
아빠는 말했다. “내가 너를 때린 건 네가 어려서 그랬어.” 그리고 같은 입으로 “너는 너무 애 같다”고 말한다. 나는 순간 멈췄다. 20대 후반인 나를 아직도 “애 같다”고 평가하는 게 정말 합리적인 걸까? 한쪽에서는 당시에도 지금의 나보다 많은 나이였음에도 “어려서 때렸다”라며 과거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제 애처럼 굴지 마라”라며 현재의 감정을 깎아내린다. 결국 과거의 폭력도 정당화되고, 현재의 감정도 무시된다. 그 말들이 쌓이면 나는 마치 어느 선택을 해도 틀린 사람이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반복적 패턴을 Infantilization(인팬틸라이제이션)이라고 부른다. 성인이 된 자녀를 여전히 미성숙한 존재로 취급해 권력 우위를 유지하려는 행동이다. 2019년 Harris의 연구에서는, 부모가 성인 자녀를 지속적으로 “아이 취급”할 경우 자녀의 자기효능감(self-efficacy)과 의사결정 능력이 유의미하게 낮아진다고 보고했다. 이는 성인 자녀의 독립과 심리적 안녕감에 직접적인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더 큰 문제는 부모가 보내는 메시지가 모순적일 때다. “어려서 때렸다”와 “애 같지 마라”는 발화는 피해자에게 상반된 요구를 동시에 던진다. 심리학자 Gregory Bateson은 이를 Double Bind(이중 구속)라 불렀다. 이런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피해자는 어떤 선택을 해도 비난받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만성적 죄책감·불안·우울 증상을 경험하기 쉽다. 실제로 2020년 국내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부모의 모순적 양육 경험이 보고된 집단에서 우울증상 유병률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1.7배 높았다.
나는 이제 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 내 감정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때 비로소 어른으로 대우받기 시작한다. 부모가 여전히 나를 “애”로 만들 때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지만, 그 말이 모순임을 인식하고 경계를 세우는 순간 나는 스스로 나를 어른으로 만든다. 내 삶의 주도권은 그때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온다.
Harris, A. J. (2019). Parent–child infantilization and its effects on adult autonomy and self-efficacy. Journal of Family Psychology, 33(7), 890–902.
https://doi.org/10.1037/fam0000543
Bateson, G., Jackson, D. D., Haley, J., & Weakland, J. (1956). Toward a theory of schizophrenia. Behavioral Science, 1(4), 251–264.
→ Double Bind 이론을 처음 제시한 고전 논문
Kim, Y. J., & Lee, H. S. (2020). The effects of inconsistent parenting on adult depression: The mediating role of guilt and anxiety. Korean Journal of Counseling and Psychotherapy, 32(3), 799–823.
→ 국내 연구, 부모의 모순적 양육과 우울증상 간의 관계를 분석
Briere, J., & Scott, C. (2014). Principles of trauma therapy: A guide to symptoms, evaluation, and treatment (2nd ed.). Thousand Oaks, CA: Sage.
→ 트라우마 재외상화, 관계적 트라우마 설명
van der Kolk, B. A. (2014).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New York: Viking.
→ 트라우마가 뇌와 신체에 미치는 영향, 감정 반응이 현재형으로 재생되는 이유 설명
아빠는 자주 내게 “애 같다”고 말한다. 그 말은 표면적으로는 “너 아직 미성숙하다”라는 의미로 들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사실 이런 뜻이다. “왜 내 기분을 맞춰주지 않니?”, “왜 나를 띄워주지 않니?” 즉, “애 같다”는 말은 성숙·미성숙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적 기대의 문제다. 아빠는 내가 그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그의 기준에 맞춰 대화해 주길 원한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말, 솔직한 감정 표현, 비위를 거스르는 직설은 모두 “애 같은 행동”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맞춰왔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빠의 눈치를 봤고, 갈등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패턴을 fawning (유화 반응)이라고 부른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나 권력자에게 기대에 맞춰 행동하고, 긴장을 최소화하려는 방어 전략이다(Herman, 1992). 나는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관계를 위해 나를 전적으로 희생하지 않는다. 에너지를 쏟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더 이상 이 관계를 중심으로 나를 소모하지 않겠다.” 이건 관계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경계 설정으로 볼 수 있다.
아빠는 내가 자기 비위를 맞춰주길 원하지만, 나는 거짓으로는 맞춰주지 않는다. 내가 상대를 띄워줄 때는 진심으로 띄운다. 그게 내 방식이다. 연구에 따르면, 진실성이 없는 칭찬은 상대방에게 단기적 위안을 줄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신뢰를 깎아내린다(Henderlong & Lepper, 2002). 반대로 진심에서 우러난 긍정적 피드백은 상대의 자기효능감을 높이고 관계 만족도를 유지한다. 즉, 내가 거짓 없이 관계를 대하는 건 더 성숙한 방식이다. 맞춰주기만 하는 관계는 안전하지만, 진실 없는 관계는 결국 무너진다.
자기결정성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Ryan & Deci, 2000)은 자율성(autonomy), 유능성(competence), 관계성(relatedness)이 기본 심리 욕구라고 말한다. 이 욕구가 충족될 때 사람은 심리적 웰빙을 느낀다. 내가 거짓 없이 대화하고, 필요할 때 거리를 두는 건 “나는 내 자율성을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오히려 이런 태도가 성인의 대화 방식에 가깝다. 상대의 기대에 끌려다니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만나는 관계가 되려면 경계 설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Herman, J. L. (1992). Trauma and Recovery. Basic Books.
Henderlong, J., & Lepper, M. R. (2002). The effects of praise on children’s intrinsic motivation: A review and synthesis. Psychological Bulletin, 128(5), 774–795.
Ryan, R. M., & Deci, E. L. (2000). Self‐Determination Theory and the Facilitation of Intrinsic Motivation, Social Development, and Well‐Being. American Psychologist, 55(1), 68–78.
아빠는 늘 이렇게 말한다. “넌 사회생활을 안 해서 사회생활할 줄 모른다.” 어쩌면 아빠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거짓으로 웃고 원하지 않는 말을 맞장구치는 걸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사회생활을 모른다”는 말은 “너는 나를 기분 좋게 하는 법을 모른다”는 뜻에 가깝다. 하지만 사실 나는 외부 평가에서 늘 “사회성 좋다”, “상황을 잘 읽는다”, “팀워크가 좋다”는 말을 들어왔다. 학교, 직장, 프로젝트 현장에서 나는 대화를 조율하고, 사람을 연결하고, 갈등이 생기면 풀어내는 역할을 종종 맡았다. 즉, 나는 사회성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사회성을 선택적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하고 싶은 대화는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공감하고, 더 나아가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는 대화다. 이건 관계를 깨는 태도가 아니라 관계를 성장시키려는 태도다. 연구에 따르면 건설적 피드백(constructive feedback)은 수용적 태도와 함께 주어질 때 상대방의 학습동기와 관계 만족도를 모두 높인다(London, 2003). 내 대화 방식은 오히려 성숙한 사회성의 표본이다. 거짓으로 웃으며 관계를 이어가는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편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신뢰를 갉아먹는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성(social competence)은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고,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며, 갈등 상황에서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능력이다. 즉, 사회성은 단순히 분위기 맞추기가 아니라 관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다. 과도한 동조(conformity)는 관계에 불신을 남기고, 내적 소외감을 키운다(Asch, 1956). 그렇다면 거짓으로 웃으며 이어가는 관계는 진짜 사회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모든 관계에서 날카롭게 구는 건 아니다. 나는 상황에 맞춰 사회성을 잘 발휘하고, 필요하면 사람들을 웃기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도 잘 한다. 하지만 아빠와의 관계는 다르다. 나는 이미 충분히 맞춰왔고, 그 과정에서 내 감정을 너무 많이 삼켰다. 이제는 더 이상 거짓으로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 필요한 말만 하고, 내가 무너지지 않는 거리에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London, M. (2003). Job Feedback: Giving, Seeking, and Using Feedback for Performance Improvement.
Asch, S. E. (1956). Studies of Independence and Conformity: A Minority of One Against a Unanimous Majority. Psychological Monographs, 70(9).
나는 사회성이 재능이다. 외부에서는 늘 “사회성 좋다”, “팀워크가 좋다”, “분위기 잘 읽는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기업에서 제공하는 커뮤니티 컨설팅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도 늘 “우수 참여자”로 뽑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고, 갈등을 풀고, 팀을 더 잘 돌아가게 하는 데 강점을 보인다는 공식 평가였다. 그런데 아빠는 종종 말한다. “넌 사회생활할 줄 모른다.”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곧 알았다. 아빠와 내가 사는 사회가 다르다는 것을. 아빠의 사회는 나이와 서열이 분명하고 윗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 관계 유지를 위해 자기 생각을 감추는 사회다. 내가 사는 사회는 수평적 대화와 솔직한 피드백, 다양성 존중과 감정 조율, 상호 성장과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사회다. 같은 집에 살지만, 사실상 서로 다른 사회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서로 다른 사회에 산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사회의 규칙을 강요하는 순간 생긴다. 아빠는 “사회생활할 줄 모른다”는 말을 통해 “내 사회에서 통하는 방식으로 행동해라”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할 때 자녀는 자율성이 침해되고 심리적 불안을 경험한다(Soenens & Vansteenkiste, 2010). 이런 심리적 통제(psychological control)는 우울·불안·낮은 자존감 등 부정적 결과와 중등도 상관(r≈0.26)을 보인다(Bradshaw et al., 2024). 즉, 단순한 세대 갈등이 아니라 권력 불균형과 심리적 압박이 개입된 상황이라는 뜻이다. “내 방식대로 살아라”는 요구는 자녀의 사회성을 무시하고, 자율성을 억압하는 통제일 수 있다.
문화심리학자 Geert Hofstede는 세대·문화 차이를 건강하게 넘기려면 “차이를 인정하되,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다른 사회의 규칙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서로의 사회성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 갈등을 줄이고 관계를 성숙시키는 방법이다. 강요는 관계를 닫지만, 존중은 관계를 연다. 내가 다른 방식으로 사회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게 미성숙한 것이 아니다. 그건 내가 다른 사회에서 사는 성인이라는 증거다.
Bradshaw, E. L., Duineveld, J. J., et al. (2024). Parent Autonomy, Control, and Child Well‐Being: A Meta‐Analysis. selfdeterminationtheory.org
Soenens, B., & Vansteenkiste, M. (2010). A theoretical upgrade of the concept of parental psychological control. Developmental Review, 30(1), 74–99.
Hofstede, G. (2001). Culture’s Consequences: Comparing Values, Behaviors, Institutions and Organizations Across 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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