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지우는 소음과, 다시 인간으로 남기 위한 예의
새벽 두 시 반, 제주로 들어왔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호텔로 향했다. 아빠는 이곳에서 일하고 계셨고, 나는 며칠이라도 쉬고 싶었다. 호텔 방에 들어와 약을 먹고, 아침 아홉 시쯤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처음엔 아주 사소했다. 핸드폰에서 새어나오는 영상 소리. 누군가의 대화도, 음악도 아니었다. 짧고 끊긴 소리, 웃음도 없는 화면. 그리고 이내, 기관총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삐—. 귀 안쪽에서 금속을 긁는 듯한 소리가 피어올랐다. 머리가 쿵 하고 울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버텼다. 하지만 그 소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기억’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소리 하나에도 신경계가 흔들린다. 몸이 과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섭다기보다, 황당했다. 아빠는 어른이다. 그런데 왜 자는 사람 옆에서, 그것도 총소리를 틀어놓을까. 왜 누군가는 타인의 수면을, 휴식을, 감각을 그렇게 쉽게 침범할까.
‘배려’라는 말은 이상하다. 마치 ‘특별한 선의’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것은 최소한의 경계 인식이다. 당신과 나는 다르고, 당신의 세계에도 소리가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 인식이 사라지면, 인간은 금세 폭력적이 된다. 손을 대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방식의 폭력.
나는 아빠에게 말하지 못했다. 예전의 기억이 나를 묶었다. 그때처럼 또다시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 소리가 뭐가 시끄러워.”, “예민하게 굴지 마.” 그 말들이 이미 내 귀 안에 각인되어 있다. 나는 말 대신 귀를 막았다. 몸을 웅크리고, 심장이 뛴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세상은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 사람들은 왜 이렇게 무심할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안의 소음을 타인의 공간에 투사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그 소음은 각자의 결핍과 두려움, 권력의 잔재처럼 흘러나와, 누군가의 새벽을 깨운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의 잔향 속에서 깨닫는다. “배려”는 다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예의라는 것을. 누군가의 평온을 방해하지 않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가장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아빠는 호텔에서 일한다. 나는 새벽 두 시 반에 제주에 도착했고, 밤새 이동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 약을 먹고 겨우 잠이 들었는데, 귀를 찢는 총소리에 깼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시는 아빠의 소리였다. 그 방 안에는 나와 엄마가 자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이 믿기지 않았다. “왜 저럴까?” 그는 성인이고, 사회생활도 오랜 세월 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사람이 자고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까.
어떤 사람들은 타인을 사람으로 느끼지 않는다. 이 말은 폭력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감각적 수준의 문제다. 그들에게 타인은 ‘존재’가 아니라 ‘배경’이다. 예를 들어, 가족이 옆에 누워 있어도 그건 풍경의 일부로 작동한다. 거기에 감정이나 인식이 연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소리를 낸다”만 자각하고, “누군가 그 소리를 듣는다”는 상상에 이르지 못한다. 즉, 타인의 존재를 환경처럼 소비하는 인식 구조다. 당신이 깨어 있든, 자고 있든, 그들의 의식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당신은 그들의 세계에서 풍경의 일부로 삭제된 존재가 된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이상하다. 사회에서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예의를 지키지만, 가족에게는 그 예의를 가장 먼저 거둬들인다. “가족이니까 괜찮겠지.” 이 문장 안에는 배려를 생략할 권리가 숨어 있다. 아빠의 행동은 악의가 아니라, 오랜 시간의 습관적 둔감이다. 호텔처럼 늘 소음이 흐르는 환경, 일터에서의 피로, 그리고 집에서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도 된다는 오래된 관념. 그것들이 합쳐져 ‘조용함’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그는 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 소음에 익숙한 인간으로서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 안엔 타인도, 침묵도, 감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에는 두 종류가 있다. 때리거나 소리치는 명백한 폭력, 그리고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 폭력. 후자는 훨씬 더 깊다. 존재를 지우는 폭력은 그 어떤 물리적 타격보다 오래 남는다. “내가 여기 있다”는 감각이 사라지면, 사람은 현실감을 잃는다. 당신의 신경계가 비명을 지른 이유는 바로 그거다. 총소리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가 무시된 상황 자체가 신체를 공격한 거다. 그래서 이건 단순히 예의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윤리에 관한 일이다.
함께 사는 인간은, 타인의 잠을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문명을 유지한다. 이건 법 이전의 윤리, 존재가 서로를 존중하는 가장 원초적 약속이다. 잠자는 사람 곁에서 큰 소리를 내는 행위는 “나는 네가 여기 있어도 상관없다”는 무의식적 선언이다. 그 순간, 타인은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 없는 물체’로 전락한다.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인식하는 구조의 붕괴다.
나는 그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건 과거의 학습 때문이다. “그 정도 소리가 뭐가 시끄러워.”, “예민하게 굴지 마.” 이런 말들이 과거에 이미 상처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침묵은 선택이 아니라 몸의 기억이다. 항의해봤자 이해받지 못하고, 결국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몰렸던 기억. 그때의 공포가, 지금의 침묵을 만든다. 그는 여전히 소리를 내고, 나는 여전히 귀를 막는다.
많은 사람들이 ‘배려’를 따뜻한 성품으로 이해하지만, 실은 그것은 인식의 능력이다. 배려는 이렇게 말하는 능력이다. “나는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말은 손을 내밀지 않아도, 소리를 줄이는 행위로 표현될 수 있다. 그게 바로 ‘존재의 예의’다.
이 세상은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화면 속에서, 각자의 소리를 내며, 서로의 존재를 점점 더 풍경처럼 소비한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으로 남으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건 “조용히 하는 법”이다. 말을 줄이고, 소리를 줄이고, 타인의 공간을 존중하는 일. 그건 단지 매너가 아니라, 문명적 생존 본능이다.
그날 나는 귀를 막고 누워 있었다. 이명은 울리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의 평온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다정이 아니라 존엄이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앞으로 어떤 공간에서도 타인의 존재를 환경으로 취급하지 않겠다고. 그게 내가 겪은 고통이 낳은, 유일한 문명적 약속이니까.
아빠는 내가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니는 걸 싫어한다. 처음엔 “괜찮다”고 하셨지만, 어느 날부터는 쌍욕을 하며 가지 말라고 했다. “정신력으로 이겨내야지, 뭐가 이상해서 그런 데를 다니냐.” 그 말은 오래전부터 익숙했다. 우리 세대는 늘 그런 식으로 자라났다. 힘들면 참아야 하고, 불안하면 노력해야 했다. 울면 약하다고, 쉬면 나태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그 말은 단순히 무지한 충고가 아니라, 감정과 고통을 다루는 언어가 결여된 세대의 자위적 주문이었다는 걸.
아빠는 밤마다 소리를 낸다. 게임, 총소리, 비명, TV, 유튜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귀 안에서 이명이 울린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도 조용한 곳이 불안한 것이다. 침묵이 오히려 위협처럼 느껴지는 사람. 조용히 있으면 불안이 몰려오고, 그래서 스스로를 자극해야만 겨우 버틸 수 있는 사람.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교감신경 과활성(Hyperarousal) 상태다. 몸이 항상 ‘위험 대비 모드’에 놓여 있어서, 쉼을 ‘위험’으로 인식하는 상태. 결국 그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그가 나에게 던진 그 말, “정신력으로 이겨내라”는 말은 사실 나를 향한 말이 아니다. 그건 평생 자신에게 해온 주문이다. 자기 안의 불안을 억누르고, 분노를 덮고, 감정을 느낄 틈조차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주문. 그는 내 고통을 부정한 게 아니라, 자기 고통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한 거다. “네가 병원에 다니면, 내가 평생 버텨온 방식이 틀린 게 되어버리니까.” 그 말 속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그는 무너지기 싫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부정의 대가로, 나를 부정했다.
아빠 세대는 감정을 언어로 배우지 못했다. 그들에게 감정은 처리의 대상이 아니라 억제의 대상이었다. 그건 교육의 실패가 아니라 시대의 생존 전략이었다. 가난, 폭력, 군사문화, 남성성 이데올로기. 그 모든 것이 “참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 규칙은 효율적이었지만, 인간적이지 않았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통제와 자극만 남았다. 그래서 그는 고요함을 견디지 못하고, 폭력적 소리에 의지하며, 그것을 “힘”이라 착각한다.
그들은 슬픔을 표현하는 대신 술을 마셨고,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감정의 극복이 아니라, 감정의 삭제였다. 그들이 말한 정신력은 사실상감정의 결빙을 미화한 신화였다. 아빠는 그렇게 살아남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감정 체계를 잃었다. 이제 그 체계는 총소리와 소음으로만 유지된다. 그는 자신이 병들었다는 걸 모른다. 조용하면 무너질 테니까.
나는 감정을 언어로 다루는 세대에 속한다. 그는 감정을 억제하는 세대다. 이건 가치관의 싸움이 아니라, 신경계의 언어가 다른 두 인간의 충돌이다. 내 신경계는 치료를 원한다. 그의 신경계는 생존을 원한다. 나는 고요 속에서 회복하고, 그는 소음 속에서 버틴다. 우리는 같은 방에 있지만, 서로 다른 시대의 뇌로 살아간다.
나는 치료를 통해 나 자신을 ‘조정’하려 한다. 그는 부정을 통해 ‘유지’하려 한다. 나는 내 신경계를 다스리고자 하고, 그는 자신의 신경계를 잊고자 한다. 둘 다 생존의 방식이지만, 그 중 하나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방식이다. 그게 윤리의 차이다. 나는 내 불안을 내면으로 수습하지만, 그는 자신의 불안을 소리로 발산한다. 그래서 나는 고통을 느끼고, 그는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아빠는 종종 그 말을 했다. “넌 어릴 땐 그렇게 밝았는데, 왜 이렇게 달라졌냐.” 그 말은 매번 이상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아빠 앞에서 한 번도 밝았던 적이 없다. 항상 눈치를 봤고, 긴장했고, 그의 표정을 살피며 어떤 말이 폭력을 불러올지 계산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밝았다”고 말한다. 그가 떠올리는 시기는 늘 5살보다 어릴 때다. 그 이후로 그는 나를 두들겨 팼고, 나는 웃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그때의 네가 좋았다”고 말한다. 그가 그리워하는 건 ‘나’가 아니라 그에게 불편하지 않던 아이다.
그가 나를 두들겨 패던 시절 이후로 그는 내 표정 속에서 늘 어딘가 껄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나의 변화”로 해석했다. “넌 변했어.” 하지만 사실, 변한 건 나의 표정이 아니라 그의 위치였다. 그가 폭력을 행사하던 순간, 우리 관계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거리로 밀려났다. 그는 그 거리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나를 정화된 기억 속으로 되돌린다. 폭력 이전의 나만 기억 속에 남긴다. 그건 죄책감을 덮기 위한 무의식적 자기 보호다. “그 아이는 행복했다. 내가 그 아이를 망가뜨린 게 아니라, 세상이 그랬던 거야.” 그렇게 기억을 조작해야만 그는 자신이 괜찮은 아버지로 남을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다시 밝아졌으면 좋겠다”는 건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말이 아니다. 그건 자신의 불편함이 사라지길 바라는 말이다. 내가 어둡게 있으면, 그는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의 폭력을 떠올려야 한다. 그는 그 불쾌한 기억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나에게 웃음을 강요한다. “밝아져라”는 말은 곧 “내 죄책감을 덜어줘라”는 말이다. 그는 여전히 나의 고통을 치유할 생각이 없다. 그는 그저 나의 표정이 자신의 불안을 자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들은 종종 밝음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러나 어떤 밝음은 폭력이다. 그건 억눌린 자가 강요당한 연극이다.
아동기 학대나 가정 폭력을 겪은 사람들은 종종 “밝은 아이”로 기억된다. 그건 그들이 진짜로 밝아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조절한 결과다. 웃으면 덜 맞고, 순하면 덜 무시당한다. 그건 기쁨이 아니라, 생존 기술이었다. 그때의 웃음은 감정이 아니라 신체의 방어기제였다. 그런데 가해자는 그 방어를 ‘성격’으로 착각한다. “그땐 참 밝았는데” 그건 아이의 생존을 자신의 공으로 둔갑시키는 말이다.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기억 속에서 자신의 잔혹함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억을 ‘무해한 서사’로 바꾼다. 그게 가해자 기억의 본능적인 특징이다. 그들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그들의 기억은 자기 보존의 서사다. 그 속에서 피해자는 늘 “이상하게 변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밝던 애가 왜 저래졌을까?” 그 말은 사실 이렇게 바꿔 읽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인정할 수가 없다.”
아빠의 기억 속에서 나는 여전히 다섯 살이다. 밝고, 착하고, 말 잘 듣고, 그를 안심시키던 아이. 하지만 현실의 나는 다르다. 나는 말할 수 있고, 화를 낼 수 있고, 그의 폭력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그 기억 속에서 나를 불러내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그의 기억의 조연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의 주연이다.
#생각번호202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