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피해의 언어를 다시 쓰고, 나의 이름으로 회복하다
요즘 나는 그 생각을 자주 한다. “이젠 좀 괜찮아지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또 생각한다. “괜찮아지면, 아빠가 위안을 얻을지도 몰라.” 그때 나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나는 내 상처가 남아 있는 게 싫은데, 한편으론 그 상처가 나를 지켜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상처가 사라지면, 그가 했던 일이 정말 아무 일도 아니게 될까 봐 무섭다.
사람들은 흔히 회복을 “좋은 일”로만 본다. 상처가 아물면 축하해야 한다고. 하지만 내겐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가 괜찮아지는 순간, 그가 나를 두들겨 패던 시간들이 ‘과거형의 사건’으로 봉인되어버릴 것 같다. 마치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젠 다 지난 일”이 되어버릴까 봐 두렵다. 나의 괜찮음이 그의 면죄부가 되어버리는 세상. 그건 너무 잔인하다.
나는 오래도록 이렇게 배웠다. “내가 웃으면 아빠가 화내지 않는다.”, “내가 괜찮으면 가족이 안전하다.” 그건 아이의 생존 공식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 대신 아빠의 감정을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 습관이 아직 남아 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때리지 않지만, 내 몸은 여전히 ‘아빠의 안심’을 위해 반응한다. 내 감정이 그를 흔들까 봐 조심한다. 내 회복조차 그를 안심시킬까 봐 망설인다.
나는 이제 안다. 진짜 회복은 누군가의 반응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가 위로받든, 무시하든, 후회하든 그건 그의 몫이다. 내가 괜찮아지는 건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삶을 내 이야기로 돌려놓기 위한 선택이다. “내가 괜찮아지는 건 그의 위안이 아니라, 내 자유의 선언이다.” 이 문장을 나는 자주 되뇌인다. 처음에는 머리로 이해했지만, 이제는 몸이 그 뜻을 조금씩 믿기 시작했다.
회복은 항상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가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괜찮지 않은 나를 일부러 남겨둔다. 그건 약함이 아니라, 윤리의 기억이다. 내가 여전히 아픈 건 그의 폭력이 잊히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그가 다시는 그 일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 몸의 저항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받아들인다. “괜찮지 않음”도 나의 일부라고. 그건 회복이 멈춘 게 아니라, 회복이 진실을 잃지 않으려는 방식이다.
나는 이제 ‘누구의 아들’이 아니라, ‘나’의 이름으로 회복하고 싶다. 그의 죄책감이 나를 정의하지 않도록, 그의 안심이 나의 목표가 되지 않도록. 그가 죄책감을 느끼든, 끝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든,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다시 잘 자고, 잘 먹고, 누군가와 웃을 수 있다면, 그건 나의 세계가 회복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만든 어둠에서 벗어나 내가 나의 빛으로 서 있다는 뜻이다.
회복은 용서가 아니다. 회복은 망각이 아니다. 회복은 단지 그의 이름으로 쓰인 문장을, 다시 나의 이름으로 고쳐 쓰는 일이다. 그 문장 안에서 나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다. 나는 증인이고, 생존자이며, 나의 서사의 저자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정말로 괜찮아질 것이다. 그가 위안을 얻든 말든, 그건 이제 상관없는 일이다.
어릴 적부터 들었다. “남자는 울지 마.”, “남자는 참아야 한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 그 말 속에는 단 하나의 명령이 있었다. 감정을 느끼지 말라. 감정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약함의 증거였다. 그래서 나는 점점 감정을 ‘없애는 법’을 배웠다. 감정을 없애면 안전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그저 이름을 바꿔 다시 나타난다. 불면, 분노, 무감각, 이명, 폭식, 통제. 그 모든 것이 억눌린 감정의 귀환이었다.
피해 서사는 오랫동안 여성의 언어로만 존재해왔다. 학대, 폭력, 트라우마. 그 단어들은 자연스럽게 여성 피해자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남성 피해자는 늘 존재하지만 발화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사회는 남성에게 “가해자의 가능성”은 상상하지만, “피해자의 가능성”은 상상하지 않는다. 남성의 고통은 종종 ‘성격 문제’, ‘가정 문제’, 혹은 ‘인생 실패’로 번역된다. 감정의 언어가 권력 구조에 의해 젠더화된 것이다.
남성 피해자는 세 겹의 침묵 속에 산다.
1. 사회적 침묵 — 남자는 강해야 한다. 감정을 말하면 남성성이 의심받는다.
2. 제도적 침묵 — 지원 체계가 여성 중심이다. 상담소, 법률구조, 보호시설, 정책 모두 남성 피해를 상정하지 않는다.
3. 내면적 침묵 — “내가 피해자라면, 나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자기 부정이 가장 잔인하다.
이런 구조 속에서 남성 피해는 감정이 아니라 사건으로만 기록된다. 사건이 끝나면, 그 고통은 사라진 것으로 취급된다. 남성의 눈물은 역사적으로 증거 불충분이었다.
“정신력으로 이겨내라.” 그 말은 남성에게 특히 자주 던져진다. 그건 격려의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감정의 부정 명령이다. 정신력이라는 이름 아래, 남성은 슬픔을 분노로, 불안을 냉소로, 두려움을 무표정으로 번역한다. 그건 ‘강함’이 아니라, 감정의 전환 훈련이다. 그래서 그는 울지 않고, 대신 부서진다. 그 부서짐이 너무 조용해서,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가 “밝아라”, “이겨내라”고 말하던 세대의 끝에 서 있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걸 ‘성숙’이라 믿었고, 감정을 다루는 걸 ‘사치’라 여겼다. 그 믿음은 남성의 몸을 두 번 죽인다. 첫 번째 죽음은 감정을 잃을 때, 두 번째 죽음은 감정을 되찾으려 할 때다. 그때 사회는 다시 말한다. “남자답지 못하게 왜 그러냐.”
상담기관은 남성 피해자에게 종종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를 이해해보세요.”, “남자끼리 툭툭 털고 일어나야죠.” 그 말은 공감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재현이다. 남성 피해자는 여전히 ‘돌봄의 주체’로만 상정된다. 그가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상상은 제도 설계의 문법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남성에게 필요한 건 정신력이 아니라, 감정의 복권(復權)이다. 슬픔을 느낄 권리, 두려움을 말할 권리, 위로를 받을 권리. 이건 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회복력에 관한 문제다. 감정을 잃은 강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감정을 되찾는 용기만이 진짜 회복이다.
나는 이제 “남자답지 않다”는 말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 말은 결국 “감정을 인간답게 느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우는 건 약해서가 아니라, 오래 참아온 인간이 다시 감정을 말하는 법을 배운다는 증거다. 그건 패배가 아니라 귀환이다. 나는 피해자이기 전에 인간이고, 남성이기 전에 존재다. 그리고 이 존재는 지금, 감정을 복원하며 다시 태어난다.
정신력은 생존의 언어였다. 감정은 인간의 언어다. 이제 우리는 생존에서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남성 피해자가 자기 감정을 말할 수 있을 때, 그건 단지 한 개인의 회복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감정 문해력 회복이다. “나는 강한 남자가 되려는 걸 그만두었다. 대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게 나의 회복 선언이다.
아빠가 또 말했다. “같이 맥주 한잔하자. 오랜만에 놀자.” 그 말은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내 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오래된 경보기가 다시 울리듯 긴장한다. 술이라는 단어는 내게 ‘대화의 초대’가 아니라 ‘불안의 신호’다. 그는 늘 그렇게 말을 꺼냈다. “한잔하자.” 그러면 나는 언제나 준비되지 않은 사람으로 남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농담처럼 진심을 던졌고, 나는 침묵으로 반응해야 했다.
그의 세대는 감정을 말로 나누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감정 대신 술을 꺼냈다. 술이 올라오면 그들은 웃을 수 있었고, 술이 식으면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술은 언어였고, 사과 대신 맥주 한 캔을 내미는 것이 ‘화해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술은 다르다. 나는 그 술잔 위에서 수없이 불편한 농담과, 돌아오지 않은 사과를 봤다. 술은 대화를 대신하지 못했다. 그건 언제나 감정의 우회로이자 회피의 도구였다.
이젠 솔직히 인정한다. 나는 기분조절이 어렵다. 그래서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특히 아빠 앞에서는. 그건 단순히 취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술을 마시면 감정의 뚜껑이 너무 쉽게 열리고, 그 뚜껑 안엔 아직 덜 정리된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술이 아닌 말로 이야기하고 싶다. 그의 방식이 아닌, 내 방식으로.
가끔은 안다. 그의 말에 외로움이 섞여 있다는 걸. 그는 단순히 술을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나와 다시 연결되고 싶어 한다. 다만,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연결의 방법이 술일 뿐이다. 그래서 그가 “술 한잔하자”고 말할 때, 그 말 속엔 “미안하다”와 “외롭다”가 뒤섞여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이해한다고 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니다.
술기운에 나눈 대화는 다음 날이면 증발한다. 사과도, 이해도, 약속도 남지 않는다. 술이 식으면 감정도 식는다. 그건 화해가 아니라 감정의 일시적 해제일 뿐이다. 나는 이제 그런 화해를 원하지 않는다. 잠깐의 온기보다 조용한 진심이 더 그립다.
어쩌면 언젠가 그가 술잔이 아닌 말로 나를 부를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그제서야 맥주 한 모금 대신 진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나를 지킨다. 술잔 위에서 반복되던 화해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언어로 이어지는 관계만 남긴다.
어릴 적 아빠는 나를 향해 늘 말했다.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그 말에는 단순한 훈육 이상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건 아빠가 통제 가능한 질서를 원했다는 의미였다. 아이의 호기심, 감정, 몸짓은 그 질서를 깨뜨렸다. 그에게 ‘가만히 있음’은 평화가 아니라 지배의 방식이었다.
이제 시간이 흘러, 아빠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조용하면 불안한 듯 TV를 틀고, 게임을 켜고, 왔다 갔다 하신다.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걸 느끼는 것처럼. 과거의 통제자였던 그는 이제 자기 내면의 공허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소음으로 불안을 덮고, 움직임으로 고요를 피한다.
나는 더 이상 ‘정신 사납다’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생각하고, 고요 속에서 나를 찾는다. 그가 두려워한 그 고요가 나에게는 이제 안정의 증거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괜찮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엔 내가 흔들리고, 아빠가 단단해 보였다. 이제는 내가 고요하고, 아빠가 흔들린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예전처럼 밝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그 ‘밝음’은 그가 원하던 순종의 빛이었을 뿐이다. 나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빛난다. 움직이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는, 조용한 빛으로.
내 몸은 이제 도망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아도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머리는 아직 멈추지 않는다. 생각은 물결처럼 밀려오고, 문장들은 쉴 새 없이 떠오른다. 이건 단순히 생각이 많아서가 아니다. 위험이 사라졌다는 걸 몸이 알아도, 마음은 아직 그걸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CPTSD의 신경계는, 늘 “다음 위험”을 예측한다. 그 예측이 끊긴 순간이 공허로 느껴진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조용히 앉아 있을 때조차, 머리는 ‘무언가를 대비하라’는 명령을 계속 내린다. 생존의 기억이 아직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몸은 멈춰도 마음은 계속 달린다. 고요 속에서만 들리는 엔진 소리 — 그건 내 머릿속의 불안의 회전음이다.
나는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살아남았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느끼기보다, 상황을 분석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건 슬픔의 대체재였다. “이건 왜 아픈 걸까?”라고 묻는 동안만큼은 “아프다”는 사실을 잠시 미룰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나는 이해하려고 한다. 내 감정, 타인의 행동, 세상의 부조리까지. 머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이해가 곧 방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예전처럼 생존의 신호가 아니다. 이제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리듬이다. 내 머리의 움직임은 더 이상 적의가 아니라, 나의 일부다. “나는 고요 속에서도 움직이고, 움직임 속에서도 고요하다.”
#생각번호202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