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구조에서 시험받는다
영범이는 말했다. “가족 안 볼게요. 다 버릴게요.” 하지만 그 말은 끝내 실행되지 않았다. 그는 떠날 수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그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그의 발은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관식이와 달랐다. 관식이는 육지로 가는 배에서 뛰어내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건 미친 짓이었지만, 동시에 완전한 결단이었다. 영범이는 끝까지 이성적이었고, 그 이성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랑을 말할 줄은 알았지만, 사랑으로 살아낼 줄은 몰랐다.
영범이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가족에게 효자였고, 사람들에게는 신뢰받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그는 구조 안에서 길러진 사람이었다. 가족, 명예, 체면, 책임 — 이 단어들이 그를 인간답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빼앗았다. 그는 ‘올바름’ 속에서만 자신을 인정받았고, 그 올바름을 벗어나는 순간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금명이보다도, 사실은 자신이 더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는 금명이를 사랑한 게 아니라, 금명이를 사랑하는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거다.
많은 사람은 그를 비겁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영범이는 도망친 게 아니라, 끝까지 “착한 사람”으로 남으려 애썼다. 착한 사람은 타인을 해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욕망을 죽인다. 그는 버텼다. “이게 옳은 일일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결국 그는 세상에 남았고, 세상은 그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었다.
영범이가 뛰어내리지 못한 건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계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유보다 안전을 택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그건 그가 속한 시대, 그가 배운 질서, 그가 사랑을 이해한 방식이 모두 생존 중심의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관식이처럼 바다로 뛰어내릴 줄 몰랐다. 왜냐면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자기 인생을 위해 미쳐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관식이는 사랑을 택했고 세상을 잃었다. 영범이는 세상을 택했고 사랑을 잃었다.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패배했지만, 세상은 늘 후자 같은 사람들로 유지된다. 그게 사회의 질서이자, 인간의 비극이다. 영범이는 실패하지 않았다. 단지 살아남았을 뿐이다.
금명이는 어릴 적부터 사랑받는 법을 배웠다. 그녀의 부모는 세상에 상처받지 않게, 늘 깨끗한 옷과 말과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랑은 온실에서 자라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계산되고, 불완전하고, 거칠다. 그녀는 그 불완전함을 견디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사랑받는 법만 배운 사람은, 사랑이 흔들릴 때 너무 쉽게 무너진다.
금명이 부모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딸의 세상을 대신 살아준 사람들이었다. “그건 네가 안 해도 돼.”, “우리 금명이는 힘든 일 안 해도 돼.” 그 말들은 따뜻했지만, 동시에 잔인했다. 아이의 ‘자기 판단력’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늘 ‘옳은 선택’을 해줘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고, 결국 자기 욕망을 말하는 법을 잃었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도 상대의 감정보다 ‘정답’을 찾았다. ‘이게 옳은 사랑일까?’, ‘이게 좋은 여자일까?’ 그녀는 사랑을 윤리 문제처럼 대했다.
금명이는 감정적으로 풍부했지만, 그 풍부함이 관계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을 잘 표현했지만, 상대의 감정이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면 바로 혼란에 빠졌다. 그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관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 경험이 없어서였다. 부모는 언제나 그녀를 이해해줬고, 실패는 곧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로 덮였다. 그래서 연애에서도 상대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으면 ‘사랑이 식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금명이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확인받는 사람이었다.
결혼은 결국, 타인과의 협상이다. 하지만 금명이는 협상 대신 설득을 택했다.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맞서면서도, 그 싸움의 본질을 몰랐다. 그건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주체’를 세워본 적 없는 사람의 낯선 분투였다. 그녀는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아니요”라고 말했지만, 그 말 뒤의 세계를 감당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사랑은 무너졌다. 그녀는 세상을 원망했고, 세상은 그녀를 “나대는 여자”라 불렀다. 사실 그녀는 나대한 게 아니라, 처음으로 살아보려 한 것뿐이었다.
금명이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 실패는 어쩌면 필연이었다. 무균실에서 자란 아이가 세상의 먼지와 부딪히지 않고는 진짜 인간이 될 수 없으니까. 그녀는 사랑받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게 그녀의 비극이자, 동시에 희망의 시작이다. 끝까지 사랑받으려 한 사람은, 결국 사랑을 잃고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만난다.
내 또래가 부모에게 짜증을 내고, 형이 투정부릴 때에도, 나는 늘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는 억울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언제나 조용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화내면 위험하다.” 감정은 곧 폭발을 부르고, 폭발 뒤에는 늘 무너진 무언가가 남았다. 그래서 나는 말을 아꼈고, 생각을 정리했고, 감정을 이성으로 번역하며 살아남았다. 다른 아이들이 울 때 나는 설명했다. 그게 나의 방어이자, 나의 언어였다.
이제야 안다. 투정이란, 관계를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부모가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사랑이 깨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은 투정할 수 있다. 나는 그걸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관계의 온도를 계산했고,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사랑은 늘 불안정했고, 감정은 늘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폭탄’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받는 법은 배웠지만, 사랑 속에서 약해지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감정이 터지기 전에, 나는 논리를 꺼냈다. “이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어.”, “그 사람은 그런 이유가 있었을 거야.” 사실 그건 이해가 아니라, 통제였다. 내가 감정을 분석하면 그건 더 이상 나를 해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침착했고, 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성숙이라 불렀지만, 그건 사실 조숙한 방어기제였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살아야만 살 수 있었던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이 부모에게 화를 낼 때마다 나는 어쩐지 모를 분노를 느꼈다. “저건 버릇없는 짓이야.”, “왜 저렇게 비합리적이지?” 하지만 사실은 부러웠다. 나는 그럴 자유가 없었으니까. 그가 화내고 나서도 사랑받는 걸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다. 그건 세상과의 거리이자,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거리였다.
요즘은 그저 그렇다. 화를 낼 일도, 서운할 일도, 간절히 바랄 일도 없다. 그냥 하루가 흘러가고, 시간이 나를 통과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은 뭐가 제일 하고 싶어?”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하지 못한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감각 자체가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서 사라졌다. 투정이 없다는 건, 욕망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욕망을 느낄 여력이 닳았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그조차 몰랐다. 그냥 “괜찮다”고 말했다.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걸 이제야 안다. ‘괜찮음’은 편안함이 아니라, 감정이 꺼진 상태의 다른 이름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비어 있다는 걸 느낀다. 텅 빈 방 안에서도, 공기가 움직이는 걸 느낄 만큼의 감각이 돌아왔다. 그게 회복의 첫 신호일지도 모른다.
투정이란 여유에서 나오는 감정이다. 마음속에 아직 바람이 남아 있을 때, 그 바람이 좌절될 때 터져 나오는 소리다. 그런데 나는 너무 오랫동안 바람을 접었다. 감정은 물처럼 고여 있다가도, 언젠가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는 걸 믿고 싶다. 오늘은 그냥 그렇다. 하지만 ‘그냥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조금은 다행이다.
그때는 아마도, 그걸 향해 가는 길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투정도 부릴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 다시 흐르면, 세상은 다시 나를 건드릴 테니까. 지금은 그냥, 아무 일 없는 하루를 견디는 중이다. 아무 일도 없는 게 아니라, 조용히 다시 살아나는 중이다. 투정부릴 것도 없는 날, 나는 오늘도 감정을 쉬게 둔다. 그리고 그게 괜찮다고, 나에게 조용히 말해본다.
#생각번호2025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