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능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치료와 윤리 사이에서, 인간 다양성을 다시 묻다

by 민진성 mola mola

우생학의 귀환 — 기술은 진보했지만, 철학은 제자리에 있다

21세기의 생명과학은 인간의 유전적 결함을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을 거의 손에 넣었다. 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은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고, 배아 단계에서 질병을 차단할 수도 있다. 이 기술의 기저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생학의 꿈이 있다. 고통을 미리 없애고, 더 건강한 인간을 만드는 것. 하지만 이 ‘없애는 행위’는 언제나 윤리적 질문을 동반한다. 무엇을 없애야 하는가, 그리고 누가 그 기준을 정하는가?



‘없애야 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

“없애야 한다”는 말은,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은 ‘고통의 유전적 메커니즘을 끊어내자’는 의학적 선언이다. 예를 들어, 헌팅턴병이나 낭포성 섬유증처럼 뚜렷한 신체적 고통을 유발하는 질병은 치료의 대상이 명확하다. 이건 차별이 아니라, 치유의 정의(justice of healing)다. 인간의 존엄을 보존하기 위해, 생물학적 고통을 먼저 제거하겠다는 기술적 결단이다. 문제는, 이 정의가 정신적 고통과 신경학적 다양성의 경계로 넘어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서부터가 존재의 수정인가?



CPTSD는 다양성이 아니다 — 생존의 부작용이다

복합외상(CPTSD)은 흔히 “민감한 사람의 특징”, “공감 능력의 극단”으로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CPTSD는 신경계가 생존을 위해 자신을 왜곡시킨 결과다. 위험을 감지하기 위한 신경회로가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몸은 일상적 자극에도 위협으로 반응한다. 그건 예술적 예민함이 아니라, 지속적인 신경계 과부하의 상태다. 이걸 ‘재능’이라고 부르는 건 잔인한 낭만화다. 따라서 CPTSD 같은 고통은 치료 가능하다면 없애야 한다. 그건 다양성이 아니라, 인간이 더이상 버틸 수 없어서 만들어낸 생존의 부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험의 언어는 남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을 겪은 사람의 세계를 삭제할 수는 없다. 그들이 느낀 절망, 무력감, 인간관계의 붕괴 경험은 단순히 병리적 기록이 아니다. 그건 ‘고통의 언어’로 쓴 인간 보고서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하더라도, 인간이 왜 서로를 위로하고, 왜 존엄을 논해야 하는지를 상기시켜주는 기록이다. 치유 이후에 남는 건 유전자가 아니라 이해와 통찰의 기억이다.



고통을 없애되, 고통을 이해한 인간을 잃지 말라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건강한 인간’이 아니라 ‘고통을 이해하는 사회’다. 유전적 표현형을 없애는 건 고통을 줄이기 위한 기술적 진보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복잡성과 감정의 깊이를 함께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더 건강하지만 더 비인간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우생학의 실패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부재였다. 지금의 생명윤리학은 그 부재를 메워야 한다. 치유의 정의는, 고통을 없애되 그 고통을 이해한 인간을 잃지 않는 데 있다.




#생각번호202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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