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면죄의 간극

위선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구원할 수는 없다

by 민진성 mola mola

이해의 언어가 윤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늘 ‘이해하려는 태도’를 미덕으로 배운다.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행동의 맥락을 헤아리는 일. 그러나 이해의 언어는 언제나 면죄의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럴 수도 있지.”,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겠지.” 이 말은 연민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도덕적 감각의 둔화가 숨어 있다. 이해가 깊어질수록, 책임은 흐려지고, 죄는 사라진다.



이해는 인식이고, 면죄는 회피다

이해(understanding)는 “왜”를 묻는 일이다. 그건 인식의 행위다. 하지만 면죄(exculpation)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일이다. 그건 도덕적 회피의 행위다. 두 행위는 닮았지만, 방향이 다르다. 이해는 인간의 복잡성을 드러내고, 면죄는 인간의 책임을 지운다. 하나는 진실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평화를 향한 자기기만이다. “나는 네가 왜 그랬는지 안다.” 이 문장은 인간학이다. “그래서 괜찮다.” 이 문장은 위선학이다.



위선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변명할 수는 없다

위선은 언제나 의도와 책임 사이에 있다. 그건 단순한 거짓이 아니라, 의식된 모순의 선택이다. 자신이 진실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 그 불일치를 이용해 도덕적 이미지를 유지하는 행위 — 이게 바로 위선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선을 심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윤리적으로는 결코 변명할 수 없다. 이해는 구조를 밝히는 일이고, 변명은 그 구조 속에 안주하는 일이다.



연민이 윤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오늘의 사회는 위선을 공격하는 동시에, 또 다른 형태의 위선을 발명한다. ‘이해’라는 이름의 연민이 그것이다. 가해자를 이해하자, 착한 사람도 사정이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 이 말들이 윤리적처럼 들릴 때, 우리는 이미 책임 없는 공감의 시대에 들어섰다. 연민은 인간을 구할 수 있지만, 윤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해는 인간의 덕이고, 면죄는 인간의 유혹이다

우리는 위선을 이해할 수 있다. 그건 인간의 복잡성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면죄하는 순간, 이해는 더 이상 지성이 아니라 회피의 장식이 된다. 이해는 사유의 행위다. 면죄는 자기보호의 연극이다. 위선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위선을 구원할 수는 없다.




#생각번호202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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