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구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늘 ‘이해하려는 태도’를 미덕으로 배운다.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행동의 맥락을 헤아리는 일. 그러나 이해의 언어는 언제나 면죄의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럴 수도 있지.”,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겠지.” 이 말은 연민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도덕적 감각의 둔화가 숨어 있다. 이해가 깊어질수록, 책임은 흐려지고, 죄는 사라진다.
이해(understanding)는 “왜”를 묻는 일이다. 그건 인식의 행위다. 하지만 면죄(exculpation)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일이다. 그건 도덕적 회피의 행위다. 두 행위는 닮았지만, 방향이 다르다. 이해는 인간의 복잡성을 드러내고, 면죄는 인간의 책임을 지운다. 하나는 진실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평화를 향한 자기기만이다. “나는 네가 왜 그랬는지 안다.” 이 문장은 인간학이다. “그래서 괜찮다.” 이 문장은 위선학이다.
위선은 언제나 의도와 책임 사이에 있다. 그건 단순한 거짓이 아니라, 의식된 모순의 선택이다. 자신이 진실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 그 불일치를 이용해 도덕적 이미지를 유지하는 행위 — 이게 바로 위선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선을 심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윤리적으로는 결코 변명할 수 없다. 이해는 구조를 밝히는 일이고, 변명은 그 구조 속에 안주하는 일이다.
오늘의 사회는 위선을 공격하는 동시에, 또 다른 형태의 위선을 발명한다. ‘이해’라는 이름의 연민이 그것이다. 가해자를 이해하자, 착한 사람도 사정이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 이 말들이 윤리적처럼 들릴 때, 우리는 이미 책임 없는 공감의 시대에 들어섰다. 연민은 인간을 구할 수 있지만, 윤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는 위선을 이해할 수 있다. 그건 인간의 복잡성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면죄하는 순간, 이해는 더 이상 지성이 아니라 회피의 장식이 된다. 이해는 사유의 행위다. 면죄는 자기보호의 연극이다. 위선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위선을 구원할 수는 없다.
#생각번호202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