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으로 사랑하던 나에서, 존재로 사랑하는 나로
그때의 사랑은 불안보다 더 깊은 절박이었다. 그 사람의 손끝 하나, 말 한마디가 내 존재의 유무를 결정했다. 그가 웃으면 나는 살아 있었고, 그가 침묵하면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연결이었다. CPTSD의 신경계는 관계를 감정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안전, 위협, 고립 — 그 세 가지로만 세상을 구분한다. 그때 나는 그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를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건 집착이야.” 하지만 그건 단순한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CPTSD 이후의 사랑은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생존 반응이다. 관계가 끊어지면 정체성이 붕괴된다. 감정이 둔마되어 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감정이 느껴지는 ‘그 사람’에게 모든 생리적 에너지가 쏠린다. 그 사람은 나의 전부가 아니라, 나의 유일한 감각 통로였다.
그때의 사랑은 로맨틱하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 곁에 있으면 세상이 조금 덜 무서웠다. 집에 가는 길이 공허하지 않았고, 밤에 자는 게 조금 덜 두려웠다. 그건 사랑의 언어를 빌린 존재의 신호였다. 그 사람을 떠올릴 때 두근거림보다 안도감이 컸던 이유다.
그녀가 도하에게 매달린 건 사랑의 과잉이 아니라 안전의 결핍이었다. 그녀에게 도하는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따라간다는 건 ‘그에게 의존하지 않는 나’를 살아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녀의 세계는 아직 그만큼 확장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는 목숨을 걸 만큼 사랑한 게 아니라 목숨을 걸 만큼 외로웠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의 나를 관찰할 수 있다. 그 감정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건 회복의 징후다. 내 신경계가 더 이상 ‘타인’을 통해서만 안전을 확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회복된 사람은 사랑을 ‘붙잡지’ 않는다. 대신,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그 공간에는 두려움이 없고, 상대가 떠나도 나의 존재가 무너지지 않는다. 과거의 사랑은 생존이었고, 지금의 사랑은 존재다.
회복이란 상처가 아물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젠 상처를 통해서만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믿는 게 두렵다. 하지만 이제는 그 두려움이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으로 바뀌었다. 이제 나는 사랑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머무는 일’로 배워가고 있다.
#생각번호2025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