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애는 불가항력#21]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자리

‘애정수’와 집착, 그리고 우리가 범죄자를 혐오할 때 놓치는 것들

by 민진성 mola mola

드라마 이 연애는 불가항력 속에서 등장하는 ‘애정수’는 애인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신비한 주술적 장치로 설정된다. 그러나 이 약을 마신 사람들은 사랑에 이르지 않는다. 그들은 집착한다. 대상에 대한 이해 없이, 서사 없이, 그저 “갖고 싶다”는 감각만 남는다. 이 지점이 흥미롭다. 사랑을 불러일으키려는 장치는 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을 만들어내는가? 드라마가 은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은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서사(역사)의 길이에서 생겨난다. 감정만 있고 서사가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다. 그리고 이 구조는 드라마 속 허구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에서도 똑같은 장면을 반복하고 있다.



집착은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집착은 대상에 대한 ‘이해의 중단’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상대의 정체성과 삶을 함께 보려는 느린 과정이다. 하지만 집착은 그 과정을 건너뛴다.

사랑: “나는 너를 알고 싶다.”

집착: “나는 너를 갖고 싶다.”

사랑은 시간이 들고 집착은 시간을 건너뛴다. 드라마 속 애정수는 바로 그 건너뜀을 의례화한다. 상대를 이해하는 대신, 감정만 단독으로 부풀린다. 그러니 사랑이 아니라 소유가 남는다.



사랑에는 ‘정서적 여유’라는 조건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사람마다 사랑할 수 있는 용량은 다르다. 이건 의지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형성된 정서적 자원의 크기다. 누군가는 어릴 때부터 사랑받는 방식, 상처를 다루는 방식, 관계 속에서 숨 쉬는 방식을 배워왔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감정과 욕망을 수용할 여유를 가진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사랑을 배운 적이 없고, 상처를 소화하는 언어가 없으며, 감정을 조절하는 근육이 없다. 그 사람의 사랑은 자주 폭발하거나 수축하거나 소유의 형태로만 남는다. 드라마 속 집착은 이 정서적 여유의 부재를 상징한다.



그러면, 우리는 범죄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조금 더 과감하게 확장해보자.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폭력과 범죄 역시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 조절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나쁜 사람”이라서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관계에서 안정감을 경험하지 못했고

상처를 해석하는 언어가 없었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갖지 못했다.

즉,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자리에서 폭력은 자란다. 이 말을 곧바로 “그러니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해는 정당화가 아니고, 공감은 면죄가 아니다. 단지, 혐오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혐오는 그들을 더 깊은 고립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그리고 고립은 다시 폭력을 낳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인지’다

우리는 누군가를 선과 악으로 나누며 안심하려 한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라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사실, 차이는 극히 미묘하다. 사랑을 배우는 기회가 있었는가. 상처를 감당해주는 손이 있었는가. 감정의 폭발을 지탱해줄 언어가 있었는가. 그 한 지점에서 길이 갈라진다. 그러니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세계에 속해 있었는가?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연애는 불가항력의 애정수는 실패한 주술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이 감정이 아니라 서사임을 드러내는 장치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사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혐오의 자리인가, 이해의 기원의 자리인가. 사랑은 원래 선한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여유가 허락된 사람에게만 가능한 기술이다. 그리고 그 여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생각번호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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