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은 유전되지만, 반드시 발현되지는 않는다

조현병은 종종 “유전병”으로 오해된다.

by 민진성 mola mola

가족력이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발병할 것처럼 말해지고, 그 가능성 자체가 하나의 낙인이 된다. 하지만 현재 신경과학과 정신의학이 합의하고 있는 설명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동시에 덜 결정론적이다. 조현병은 유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조현병은 ‘유전되는 질병’이 아니라 ‘유전되는 취약성’에 가깝다.



취약성-스트레스 모델이라는 관점

조현병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틀은 ‘신경적 스트레스 취약성 모델(stress–vulnerability model)’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유전적 요인은 병을 자동으로 만들어내지 않는다. 대신 뇌가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방식, 즉 신경계의 민감도를 결정한다. 유전적 소인은

도파민 조절의 불안정성

시냅스 가지치기 과정의 취약성

스트레스 반응계(HPA axis)의 과활성 가능성

같은 구조적 조건을 만든다. 그러나 이 조건은 ‘가능성’일 뿐, 결과가 아니다. 그 가능성을 실제 증상으로 밀어 올리는 것은 환경이다. 그리고 그 환경의 핵심에 발달기 스트레스와 외상이 있다.



아동기 트라우마는 ‘원인’이 아니라 ‘스위치’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아동기 학대나 외상이 조현병을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전적 취약성을 가진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 외상이 증상을 활성화하는 스위치로 작동할 수 있다. 여러 연구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조현병에 대한 유전적 위험도가 높은 사람들 중에서도,

아동기 학대

정서적 방임

만성적인 불안정 환경

예측 불가능한 양육

사회적 고립

같은 스트레스 요인이 없는 경우, 평생 임상적 조현병으로 발현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 사실은 조현병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통념을 흔든다.



트라우마는 ‘사건’이 아니라 ‘신경계 상태’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트라우마는 반드시 눈에 띄는 폭력이나 학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의 신경계는

지속적인 긴장

보호받지 못한다는 감각

예측할 수 없는 환경

감정을 안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도 충분히 스트레스를 학습한다. 즉, “큰 사건이 없었다”는 말은 “신경계 스트레스가 없었다”는 말과 같지 않다.



PTSD와 조현병이 만나는 지점

아동기 외상과 조현병의 관계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 신경생물학적 변화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두 상태 모두에서 관찰되는 변화는 다음과 같다.

스트레스 호르몬 체계의 과활성

해마 기능 저하

전전두엽의 조절 기능 약화

위협 탐지 시스템의 과민화

의미 부여 체계(salience network)의 오류

이 때문에 일부 조현병 증상, 특히 편집적 사고나 환청, 현실 왜곡은 ‘현실을 잘못 인식해서’라기보다 위협과 의미를 과도하게 감지하도록 학습된 뇌의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트라우마가 없으면 발현되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은 이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유전적 소인이 있더라도, 발달기 외상과 만성 스트레스가 없다면 조현병이 임상적으로 발현되지 않거나, 매우 늦게, 혹은 비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다만 이것은 “절대 발병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아니라 발현의 확률과 강도를 낮출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질병이 아니라 조건을 바꾸는 문제

이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조현병을 개인의 결함이나 운명으로 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사람이 취약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취약성이 보호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환경이다. 그래서 조현병에 대한 논의는 진단과 약물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동기 환경, 애착, 안전, 사회적 보호에 대한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질병을 낙인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조건의 문제로 다시 사유할 것인가. 조현병을 둘러싼 질문은, 결국 우리 사회가 취약한 신경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생각번호202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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