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조절의 결손은 언제나 눈에 띄는 행동으로 나타나는가
임상 문헌에는 이런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정동 조절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개인은 활성화된 학대 관련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외부적인 방법에 의존하게 될 수 있다. 이 문장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술, 약물, 자해, 폭식, 관계 중독 같은 것들.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설명에서 벗어나는 걸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임상에서 말하는 ‘외부적 방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물질 사용에 한정되지 않는다. 외부적 방법이란, 정동을 자기 내부에서 직접 처리하지 않고 다른 경로로 우회하거나 차단하는 모든 방식을 포함한다. 여기에는 회피, 해리, 감정 차단, 과잉 작업, 관계 과의존뿐 아니라 지나친 이성화와 과도한 사유도 포함된다. 즉, 겉보기에 문제 없어 보이는 방식 역시 정동 조절의 대체 수단일 수 있다.
“나는 외부적 방법을 쓰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의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첫째, 외부적 방법이 사회적으로 문제 되지 않는 형태였을 수 있다. 감정을 느끼기보다 이해하려 하고, 고통을 경험하기보다 분석하려 하고, 정동을 개념으로 처리하는 방식 말이다. 둘째, 정동을 낮추기보다 애초에 얼리는 전략을 사용했을 수 있다. 느끼지 않음으로써 버티는 방식, 감정을 차단함으로써 통제하는 방식이다. 셋째, 정동 조절 기술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비대칭적으로 발달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감정은 과도하게 통제되고, 어떤 감정은 처리되지 않은 채 남는 상태. 이 경우 고통은 행동 문제로 드러나지 않고 내부 소모로 축적된다.
문헌이 말하는 핵심은 외부적 방법의 사용 여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이 사람은 고통을 누구와 함께 조절했는가. 정동 조절은 원래 혼자서 완성되는 기술이 아니다. 초기에는 타인과의 공동 조절을 통해 배운다. 그 과정이 부재했을 때, 사람은 혼자서 버티는 법을 먼저 배운다. 어떤 이는 술로, 어떤 이는 일로, 어떤 이는 사유로. 방식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
외부적 방법을 쓰지 않은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오해받는다. “그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야?”, “잘 버텼잖아.” 하지만 이 경우 고통은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남는다. 지속적인 긴장, 자기비판, 감정의 납작화, 몸의 증상화, 쉬지 못하는 마음. 겉으로는 기능하지만 안에서는 계속 소모된다.
외부적 방법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문헌의 설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문헌이 단순화한 평균 바깥에 위치한 하나의 전형적인 변주다. 특히 인지 기능이 강하고 언어화와 사유 능력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정동 조절의 어려움은 행동이 아니라 내부 구조로 나타난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나는 왜 외부적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가 아니라 “나는 그 고통을 끝까지 누구와 함께 견뎠을까?” 혼자였는지, 아니면 함께 조절해준 누군가가 있었는지. 이 질문은 자기비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이해를 위한 것이다.
외부적 방법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강함의 증거일 수도, 고립의 흔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이 어떻게 다뤄졌는가다. 정동 조절의 문제는 항상 소란스럽게 드러나지 않는다. 때로는 아주 조용히, 아무 문제 없는 얼굴로 사람 안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덜 오해하게 된다.
#생각번호2025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