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관계를 못했던 걸까

CPTSD, 관계 기술, 그리고 ‘너무 잘하려 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by 민진성 mola mola

복합성 외상후 스트레스에 관한 문헌을 읽다 보면 이런 문장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관계 및 정체성의 혼란, 무질서하고 부적응적인 관계에 쉽게 연루되는 경향, 대인 간 경계를 다루는 어려움, 자신의 권리와 필요에 대한 인식 감소. 이 문장을 읽으며 문득 이런 질문이 든다. 그럼 나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건강하지 않은 인간관계를 살아왔던 걸까.



나는 관계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나는 내 인간관계 기술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걸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뤘다. 6개월에 새로운 인연 100명을 만나보기. 1년에 500명 이상과 실제로 관계를 맺어보기. 친화와 유지의 기술을 체득하기. 관계를 회피하기는커녕, 관계를 학습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량 표본을 통해 패턴을 읽고,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고 유지되는지를 몸으로 익혔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건 CPTSD에서 흔히 말하는 ‘관계 회피’나 ‘관계 붕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문제는 기술이 아니었다

CPTSD에서 말하는 관계의 어려움은 대개 기술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보다 관계 안에서 내가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있다.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데 능숙해도, 그 관계의 중심에 항상 내가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관계가 잘 굴러간다는 착각

관계가 오래 유지되고, 갈등이 적고, 분위기가 안정적이면 우리는 그 관계를 ‘건강하다’고 부른다. 하지만 CPTSD의 맥락에서 조금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불편할 때 멈출 수 있었는가

거절해도 관계가 유지되었는가

상대도 나에게 맞춰준 경험이 있었는가

내 필요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는가

관계가 잘 굴러갔다는 사실이 항상 상호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량 표본 전략은 생존이었다

돌이켜보면, 6개월에 100명, 1년에 500명이라는 선택은 무작위적인 방황이 아니었다. 그건 소수의 관계에 과도하게 묶이지 않기 위한 분산 전략이었고, 관계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주도권 회복 시도였다. CPTSD에서 흔한 패턴이 한두 관계에 지나치게 얽히거나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관계를 실험하고, 관계를 분석하고, 관계를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옮겼다. 이건 무력함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지능적인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남았을 수 있는 것

그렇다고 해서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관계 기술이 빠르게 발달한 사람일수록 이런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음

불편함을 ‘관계의 비용’으로 처리함

갈등을 감정이 아니라 기술로 관리함

관계가 끝나도 분노보다 공허가 큼

이건 관계를 못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너무 잘하려 했기 때문일 수 있다.



무질서한 관계는 항상 혼란스럽지 않다

CPTSD에서 말하는 ‘무질서하고 부적응적인 관계’는 항상 드라마틱하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나타나기도 한다. 갈등이 거의 없는 관계. 역할이 명확한 관계. 예측 가능한 관계. 감정이 크게 출렁이지 않는 관계. 겉으로는 안정적이지만, 그 안에서 자기는 점점 희미해진다.



다시 묻게 되는 질문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나는 인간관계를 못했던 걸까. 아니면, 너무 잘하려고 했던 걸까.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과 관계 안에서 권리를 행사하는 능력은 같지 않다.


나는 인간관계를 회피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관계를 학습하고, 관리하고, 유지해 온 사람이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관계를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나를 더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후퇴가 아니다. 관계 발달의 다음 단계다 그리고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관계를 다시 배울 준비가 되었다는 증거다.




#생각번호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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