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왜, 이토록 번거롭게
무교인 친구가 물었다. 예수가 죄인을 구원하러 온 거라면, 전능하다는 신이 왜 일을 이토록 번거롭게 만드느냐고. 애초에 죄가 없게 만들거나, 나중에 심판 때 슥 보고 가려내면 될 일을 왜 굳이 현세에 내려와 피를 흘리는 복잡한 서사로 만드느냐는 질문. 무교의 눈으로 보면 이 구원 서사는 이도저도 아닌, 비효율의 극치처럼 보일 뿐이다.
나는 그 질문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그 '번거로움'이야말로 이 종교가 인간을 대하는 기이한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신이 인간을 기계로 만들었다면 세상은 참 깔끔했을 거다. 오류도 없고 죄도 없는 완벽한 유토피아. 하지만 거기엔 '자유'가 없다.
그리스도교의 논리는 여기서 시작한다. 거절할 자유가 없는 순종은 프로그래밍된 출력값에 불과하다는 것. 신은 인간이 자신을 거절하고 떠날 가능성(죄)을 열어두면서까지 '자유의지'를 쥐여주었다. 진정한 사랑이나 자발적인 선함은 오직 '선택할 수 있을 때'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죄는 그 자유를 준 대가로 지불한 뼈아픈 기회비용인 셈이다.
"사후에 죄인을 가려내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다. 신이라는 절대적인 기준 앞에 서면, 통과할 수 있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전제다.
만약 신이 그저 엄격한 면접관으로만 존재한다면 인류의 결말은 전원 탈락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선별' 대신 '대속'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심판주가 피고인석으로 내려와 대신 벌을 받고, 자격 없는 자들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 이건 우등생을 골라내는 선발 대회가 아니라, 물에 빠진 전원을 건져 올리려는 응급 구조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지금 당장 끝내지 않는가. 이 지점이 무교인들이 가장 의아해하는 '이도저도 아닌' 상태다. 신학적 해석을 빌리자면, 이 시간은 강요하지 않는 신의 '기다림'이다.
신이 압도적인 위엄으로 당장 눈앞에 나타난다면 인간은 공포 때문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건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다. 그래서 신은 가장 무력한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조용히 노크하는 방식을 택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며 회의하고, 방황하고, 결국 어떤 가치를 붙들지 스스로 결정할 시간을 주는 것. 이 비효율적인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논리다.
무교의 시선에서 구원 서사는 여전히 군더더기투성이다. 하지만 그 군더더기 덕분에 인간은 신의 장기말이 아닌, 자기 삶의 주체로 남는다.
구원은 티켓 한 장 끊고 입장하는 이벤트가 아니다. 깨진 관계를 수선하고, 마모된 인간성을 다시 빚어가는 지루하고 긴 과정이다. 신은 우리를 단번에 수리하는 대신, 우리가 스스로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며 곁을 걷는 쪽을 택했다.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이 모호함과 번거로움은,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신의 지독한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효율보다 관계를, 결과보다 과정을 택한 신의 고육지책 말이다.
#생각번호202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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